연작소설 — 말이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
스튜디오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유리창 너머 부조정실, 강 피디는 이미 헤드셋을 내팽개치고 방송 사고를 수습하려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뒤편, 정 팀장은 입가에 음흉한 미소를 띠며 팔짱을 낀 채 은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사연자와 실시간으로 연결된 노트북 화면이 깜빡이고 있었다. '서은하, 넌 이제 끝이야.' 그의 서늘한 눈빛이 유리창을 뚫고 꽂혔다.
은하는 심호흡을 했다. 마이크 앞에 놓인 노란 캔커피의 미지근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녀는 강 피디에게 단호하게 'Wait' 수신호를 보낸 뒤, 떨림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죽였다는 고백. 이 짧은 문장 안에 담긴 무게가 제 헤드셋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지네요. 사연자분, 지금 전화기 너머에서 많이 떨고 계신가요?”
게시판은 이미 폭발 직전이었다. 정 팀장이 고용한 배우인 사연자는 수화기를 쥔 채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다. 화면에는 부조정실의 정 팀장이 실시간 메신저로 보낸 지시가 붉은 글씨로 깜빡였다.
[지금이야. 더 악랄하게 몰아붙여. 은하의 가식을 공격해!] 사연자의 거친 숨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스튜디오 마이크에 닿았다.
은하는 눈을 감았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숨소리 끝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을 읽어냈다. 그건 가해자의 당당함이 아니라, 벼랑 끝에 선 사람의 위태로운 신음이었다.
[네... 저는 작년에 제 아이를 죽였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매일 밤 떠드는 그 예쁜 말들, 그게 얼마나 역겨운지 똑똑히 보여주려고 전화했어요. 당신도, 나 같은 살인자의 편을 들어줄 수 있나요?]
부조정실의 정 팀장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유리창을 톡톡 두드렸다. 자, 이제 대답해 봐. 함정은 완벽해 보였다.
은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헤드셋을 더 깊숙이 눌러쓰며 사연자의 목소리라는 주파수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연자분, ‘죽였다’는 그 단어를 뱉으실 때 목소리가 잠기시네요. 누군가를 정말 미워해서 한 행동이라면 그렇게 아픈 소리가 나지 않았을 텐데요. 당신이 정말 죽이고 싶었던 건... 아이였나요, 아니면 당신 자신의 일그러진 욕심이었나요?”
순간, 전화기 너머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부조정실의 정 팀장이 당황하며 노트북 자판을 거칠게 두드렸다. [정신 차려! 대본대로 해!] 하지만 사연자의 침묵은 길어졌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연자의 눈물이 수화기 위로 툭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가짜 대본의 활자가 번져나가듯, 그가 억지로 지켜온 가짜 목소리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 아니요. 아니에요. 정확히는 아이의 꿈을 죽였습니다. 제가 원하는 대학, 제가 원하는 인생을 강요하다가... 아이는 지금 방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유령이 되었습니다. 저는, 저는 정말 죽어 마땅한 살인자 아닌가요?]
스튜디오 안의 공기가 일순간 반전되었다. 자극적인 '범죄 자백'을 기대하며 쾌감을 즐기던 정 팀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대본대로라면 은하를 비난하며 파멸로 끌고 가야 할 타이밍에, 스피커에서는 전혀 다른 주파수의 '진짜 통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은하는 직감했다. 돈을 받고 연기하러 온 배우조차, 은하가 던진 '진실'이라는 거울 앞에 서자 자신의 진짜 일그러진 상처를 봐버린 것이다. 정 팀장의 붉은 지시사항보다 은하의 낮은 목소리가 사연자의 닫힌 문을 먼저 열어젖혔다.
“사연자분.”
은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단단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것들을 죽이며 삽니다. 내 욕심을 위해 타인의 기대를 죽이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내 진짜 모습을 죽이죠. 당신은 아이의 꿈을 죽였다고 자책하지만, 어쩌면 그건 당신 안에 있던 ‘완벽한 부모’라는 허상이 부서지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부서져야,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요.”
유리창 너머 강 피디가 마이크 차단 버튼에서 천천히 손을 떼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은하의 눈빛에서 흐르는 기묘한 확신이 부조정실의 불안을 잠재웠다. 그는 본능적으로 음향 페이더를 천천히 올렸다. 전화기 너머의 흐느낌과 은하의 낮은 숨소리가 세상에 가장 선명하게 닿을 수 있도록, 그는 은하의 목소리에 가장 깊고 넓은 길을 내주었다.
사연자의 마지막 고백은 정 팀장의 비열한 의지마저 완전히 짓밟아버렸다.
[매일 밤 원망했습니다. 근데 아까 아나운서님이 그러셨죠. 왜 안 괜찮은지 묻지 않았다고... 저도 제 아이에게 한 번도 묻지 않았어요. 캔커피의 온도라도 믿어보고 싶다는 그 말, 저한테 하시는 말씀 같아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실시간 청취율 그래프가 수직으로 치솟았다. 비난으로 가득했던 게시판은 순식간에 정화되었다. 광고주들의 항의 전화로 불통이었던 고객센터에는 '이런 방송을 지켜달라'는 응원이 폭주했고, 정 팀장의 스마트폰은 여론의 급변을 확인한 광고주들의 '재계약 유지' 메시지로 비명을 지르며 진동했다.
은하는 유리창 너머에서 얼굴이 흙빛이 된 정 팀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함정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오히려 정 팀장을 덮치고 있었다.
“오늘 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죽인 가해자이자, 스스로를 죽여온 피해자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곳은 정답을 맞히는 시험장이 아니라, 서로의 오답을 확인하고 온기를 나누는 상점이니까요.”
은하는 준비된 화려한 팝송 엔딩을 취소하고, 지수에게 메모를 건넸다. 지수는 눈물을 닦으며 재빨리 곡을 교체했다.
스튜디오에 나직하게 흐르기 시작한 곡은 '옥상달빛의 <수고했어, 오늘도>'였다. 가사가 흐르는 동안 은하는 마이크를 끄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헤드셋을 통해 전해지는 사연자의 가느다란 흐느낌이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 가장 화려한 말보다 가장 소박한 침묵이 세상의 오답들을 더 깊게 안아주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고 'OFF AIR' 불빛이 꺼졌다. 스튜디오 문을 열고 나오자, 강 피디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은하야... 너 진짜... 사고 치는 스케일도 레전드다.”
그때, 정 팀장이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손에 쥔 그의 스마트폰은 광고주들의 연락으로 계속해서 진동하고 있었다.
“서은하! 너 지금...!”
“정 팀장님.”
은하가 차분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그의 손에서 요란하게 울리는 스마트폰을 가리켰다.
“팀장님이 말씀하신 숫자, 그리고 광고주들이 원하는 여론. 제가 오늘 다 보여드린 것 같은데... 이제 충분하신가요?”
할 말을 잃은 정 팀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은하는 그를 지나치며 낮게 읊조렸다.
“준비하신 사연, 참 좋았습니다. 덕분에 진짜 위로가 뭔지 저도 배웠네요.”
사무실로 돌아온 은하의 책상 위에, 아까는 없던 노란 캔커피 하나가 더 놓여 있었다. 누군가 은하의 승리를 조용히 지켜본 듯, 캔 아래에는 정갈한 손글씨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작은 오답이 준 큰 위로.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은하는 캔커피를 손에 쥐었다. 아직 식지 않은 미지근한 온기가 지친 손바닥을 타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말이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은 이토록 집요하고도 따뜻했다.
은하는 책상 위에 쌓여 있던 경위서 뭉치를 들어 올려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종이 뭉치가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은하는 새하얀 원고지 위에 딱 세 글자를 적었다.
[고마워요.]
그것은 은하가 세상에 보내는, 가장 정답에 가까운 오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