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 말이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
경위서 귀퉁이에 그려 넣었던 노란 캔커피의 온기는 채 하루를 가지 못했다. 어젯밤, "진짜 오답을 듣고 싶다"던 떨림 없는 목소리가 전파를 탈 때만 해도 세상은 온통 그녀의 편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침의 방송국 복도는 어젯밤의 온기 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서늘했다.
국장실을 나온 은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번 주 안에 증명해라." 국장 대행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건 사형 집행인에게 내민 마지막 식사 같은 것이었다. 은하는 차가운 복도 벽에 잠시 어깨를 기댔다. 방금까지 들이마신 회의실의 담배 연기가 폐부 깊숙이 박혀 숨을 쉴 때마다 비릿한 쇠맛이 났다. 징계 보류라는 말은 관용이 아니라,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기다려주겠다는 잔인한 유예일 뿐이었다.
은하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모니터 속 게시판은 여전히 전쟁터였다. 지지와 비난이 엉겨 붙어 숫자가 무섭게 올라가고 있었다.
“은하 선배, 커피 마실래요?”
막내 작가 지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브랜드 로고가 선명한 비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팀 분위기 진짜 안 좋아요. 정 팀장님, 아까 광고주들이랑 통화하면서 선배 이름 몇 번이나 거론했대요. ‘리스크 관리’ 어쩌고 하면서요.”
지수는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은하에게만 들릴 듯한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선배, 조심하세요. 정 팀장님이 아까 메인 작가님 따로 불러서 '자극적인 외부 사연' 하나 준비하라고 시키는 걸 들었어요. 뭔가 터뜨릴 생각인가 봐요."
지수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직의 말단인 그녀가 이 정보를 건네는 건 자신의 자리까지 걸어야 하는 도박이었다. 은하는 그 떨림을 통해 정 팀장의 칼날이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했다. 은하는 지수가 건넨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얼음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지만 속은 여전히 타올랐다.
오후 4시, 기획 회의 시간. 강 피디의 얼굴은 평소보다 5년은 더 늙어 보였다.
“자, 국장 대행 지시사항이다. 오늘부터 당분간 ‘무조건 안전하게’ 간다. 논란이 될 만한 사연은 다 걸러내. 특히 어제 같은 돌발 멘트는 절대 금지다. 은하야, 너도 알지?”
원고 속 사연들은 하나같이 매끄러웠다. ‘열심히 살면 좋은 날이 올 거예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같은,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통조림 같은 문장들. 은하는 그 원고들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강 피디님. 만약 사람들이 설탕물이 아니라 쓴 약을 원하고 있으면요? 우리가 줄 수 있는 게 고작 이 거짓 말뿐인가요?”
“야, 서은하!”
강 피디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고함에 회의실 테이블 위의 물컵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평소 허허실실하던 그의 폭발은 공포보다 슬픔에 가까웠다. 동료를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무력감이 섞인 비명이었다.
“제발 좀 시키는 대로 하자! 나도 좀!”
회의실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은하는 차분하게 원고를 내려놓았다.
“알겠습니다. 시키는 대로 할게요. 적어도 마이크 켜지기 전까지는요.”
방송 1시간 전. 은하는 정 팀장의 사무실 근처에서 발걸음을 늦췄다. 정 팀장은 문을 살짝 열어둔 채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과시적인 목소리였다.
“네, 국장님. 오늘 방송 끝나면 바로 명분 생길 겁니다. 통제 불능인 진행자가 방송을 얼마나 망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줄 사연자 하나 섭외해뒀거든요. 서은하가 감당 못 할 사연 하나 터지면 여론은 바로 돌아섭니다.”
정 팀장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복도 끝까지 번졌다. 은하는 벽 뒤에서 숨을 죽였다. ‘준비해 둔 사연자’. 그건 은하를 하차시키기 위해 악의적으로 조작된 함정을 생방송에 투입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은하는 입술을 짓씹었다. 분노보다 먼저 차오른 건, 그 사연자가 내뱉을 '가짜 고통'에 휘둘릴 청취자들에 대한 부채감이었다.
스튜디오로 들어가는 길, 은하는 휴대폰을 켰다. 게시판 하단에 작게 남겨진 어제 그 ‘오답 청취자’의 글을 다시 읽었다.
[위로 대신 이 온기를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은하는 가방 안에서 노란 캔커피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아침에 지수가 사온 비싼 아메리카노보다, 어제의 여운이 담긴 이 캔커피가 지금의 자신에게는 유일한 생명줄 같았다.
“방송 1분 전입니다. 은하 씨, 헤드셋 쓰세요.”
유리창 너머의 강 피디는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고 있었고, 그 뒤쪽 멀리 정 팀장이 팔짱을 낀 채 은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은하는 앞에 놓인 ‘안전한 원고’를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오늘은 당신의 수고를 안아주는 밤입니다.’ 은하는 펜을 들어 그 문장에 굵게 가로줄을 그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한 문장을 적어 넣었다.
[우리는 왜 아프면서도 안 아픈 척 연기하며 살아야 할까요.]
“온 에어.”
붉은 불빛이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심야의 대화>, 서은하입니다.”
“오늘 제 책상 앞에는 방송국에서 준비해 준 아주 예쁘고 따뜻한 위로의 말들이 가득 담긴 원고가 놓여 있네요. 하지만 저는 오늘 이 원고들을 읽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 여러분의 진짜 오답을 듣고 싶습니다. 남들에게는 말 못 할, 예쁘지 않은 진실들 말이죠.”
그때였다. 게시판에 빨간색 느낌표가 달린 ‘긴급 사연’이 올라왔다.
[서은하 아나운서님, 제가 사람을 죽였다면… 그래도 당신은 제 편이 되어줄 건가요?]
부조정실의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정적은 비명보다 날카로웠다. 강 피디의 손은 전원 스위치 위에서 파르르 떨렸다. 강 피디가 기겁하며 마이크를 차단하려 손을 뻗었지만, 은하는 유리창 너머 정 팀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함정임을 알고 있다는 듯한 서늘한 미소가 은하의 입가에 스쳤다.
은하는 강 피디에게 진정하라는 수신호를 보낸 뒤, 입을 열었다.
“방금 아주 무거운 사연이 도착했네요. ‘죽였다’는 그 말이 얼마나 아픈 진실을 품고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지독한 거짓인지, 우리 함께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함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은하의 진짜 싸움도 시작되었다. 은하는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노란 캔커피를 꽉 쥐었다. 비록 캔은 차가워졌을지언정, 손바닥에 닿는 감촉만큼은 누군가의 체온처럼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