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위로는 상품이고, 감정은 옵션입니다

​연작소설 — 말이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

by 산 사람


​서은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부터 집어 들었다. 알람 소리보다 먼저 그녀를 깨운 건 세상의 소란이었다. 메신저 알림 327개, 부재중 전화 19통. 숫자들이 비명처럼 쏟아졌다.

​전날 밤, 라디오 생방송 중 내뱉은 고백은 '용기 있는 발언'과 '대형 방송 사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밤새 차오른 감정은 아침이 되자 차가운 숫자와 보고서, 그리고 '책임'이라는 무거운 이름표가 되어 돌아왔다.

​은하는 침대 끝에 앉아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사표를 던지고 싶은 아침이었다. 마이크 앞에서 처음으로 “제가 틀렸습니다”라고 말하던 순간의 떨림이 여전히 귓가에 생생했다. 그건 청취자를 향한 사과였지만, 동시에 자신을 옥죄던 가짜 삶을 끝내겠다는 선언이었다.

​방송국 로비에 들어서자 공기가 달라졌음을 직감했다. 평소 깍듯하던 경비 아저씨의 고개는 빳빳해졌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후배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스마트폰 속으로 눈을 숨겼다. 7년 차 아나운서라면 이 정도는 읽어야 했다. 어제의 박수가 오늘의 비난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라는 것을.

​회의실 문을 열자 지독한 담배 냄새가 확 끼쳐 왔다. 강 피디, 메인 작가, 광고팀장, 그리고 국장 대행까지. 평소라면 한자리에 모일 리 없는 사람들이 둥근 테이블을 뱀처럼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이건 회의가 아니라 은하를 겨냥한 청문회였다.

​“서은하 씨.”


​국장 대행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솜사탕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숨어 있었다.


​“어제 방송, 본인은 만족합니까? 그 대단한 소신이 우리 방송 시청률에 대체 무슨 도움이 됐다고 생각해요?”

​은하는 테이블 아래서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손등의 뼈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였지만, 눈빛만은 피하지 않았다.


​“만족을 논하기보다, 꼭 필요한 질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필요?” 광고팀 정 팀장이 비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뭐가 필요했는데요? 항의 전화? 끊겠다는 협찬 광고? 은하 씨, 여기는 개인방송이 아니야. 전파는 공공의 것이고, 광고는 곧 돈이라고!”

​“맞습니다. 돈이죠.”


​은하가 정 팀장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오래 ‘돈 되는 위로’만 팔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괜찮냐고 묻기만 했지, 왜 안 괜찮은지는 한 번도 진심으로 궁금해하지 않았잖아요. 가짜 약을 팔다가 진짜 환자를 만났는데, 어떻게 계속 설탕물을 약이라고 속입니까?”

​회의실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정 팀장이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 고결한 선언 때문에 협찬사에서 계약 재검토 공문이 왔어! 팀 전체가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단 말이야!”


​“그럼 수치를 한번 볼까요?”


은하가 차분하게 말을 받았다.

“협찬사가 제 ‘이미지’를 샀나요, 아니면 ‘숫자’를 샀나요? 숫자 때문이라면 어제 방송 접속자 수는 평소보다 3배나 높았습니다. 마케팅 측면에서 이건 대성공 아닙니까?”

​정 팀장이 입술을 깨물며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


“좋아, 그 잘난 숫자가 언제까지 너를 지켜줄지 두고 보자고. 광고주들이 ‘시끄러운 방송’을 제일 싫어한다는 걸 곧 뼈저리게 느끼게 될 테니까.”


정 팀장의 경고는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라, 이미 등 돌린 광고 시장의 냉혹한 예고였다.

​국장 대행이 헛기침을 하며 분위기를 정리했다.


​“좋아요. 서은하 씨의 생각은 확인했습니다. 일단 경위서 제출하고 징계는 보류하죠. 대신 이번 주 청취률 유지 못 하면, 그땐 변명 없이 하차입니다. 알겠습니까?”


​타협을 가장한 명령이었다. 다시 예전처럼 예쁜 인형이 되어 안전한 말만 뱉으라는 최종 경고.

​회의실을 나온 강 피디가 은하 곁을 지나치며 작게 웅얼거렸다.


​“너 징계 막으려고 내가 오늘 아침부터 국장실 바닥을 기어 다녔다. 적당히 좀 해, 은하야. 나도 이제 더는 못 막아줘.”


​은하는 직감했다. 오늘부터 자신은 이 조직에서 ‘위험 요소 1순위’가 되었다는 것을.

​스튜디오로 돌아오는 길, 은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예전엔 마이크 너머의 대중을 가르치려 드는 차가운 눈이었다면, 지금은 그들의 삶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된 뜨거운 눈이었다. 하지만 거울 속 은하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당당한 외침 뒤에 숨겨진, 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공포였다.

​그때, 막내 작가 지수에게 문자가 왔다.


​[언니… 어제 그 ‘오답 청취자’ 있잖아요. 오늘도 게시판에 글 남겼어요.]

​은하의 심장이 미세하게 뛰기 시작했다.


​[뭐라고 남겼는데?]


​[‘오늘은 노란 캔커피를 샀습니다. 위로 대신 이 온기를 믿어보기로 했습니다’라고요.]

​은하는 휴대폰 화면을 오래도록 들여다봤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 하지만 그 한 문장이 은하의 방송을 ‘일방적인 송출’에서 ‘진심 어린 소통’으로 바꿔놓았다. 세상 모두가 등을 돌린 줄 알았는데, 적어도 한 사람은 은하가 내민 서툰 진심을 알아봐 준 것이다. 그 온기가 은하를 다시 숨 쉬게 했다.

​그날 밤 방송. 은하는 준비된 원고를 찢어버리는 대신, 옆으로 조용히 밀어 두었다. 화려한 수식어로 가득한 거짓말 대신, 지금 이 순간의 진실을 담기 위해서였다.


​“오늘 방송은요, 평소보다 제 말을 조금 줄여보려 합니다. 라디오는 말하는 사람의 공간 같지만, 사실은 듣는 여러분의 숨소리가 채워져야 완성되는 곳이니까요.”

​작가들이 유리창 너머에서 숨을 죽였다. 은하는 게시판에서 아주 짧은 문장 하나를 골라 읽었다.


​[어제 그 말, 고마웠어요. 내 오답이 당신에게 정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려줘서.]

​은하는 문장을 읽고 바로 다음 멘트를 치지 않았다. 의도적인 여백. 스튜디오 안의 붉은 'ON AIR' 불빛이 은하의 눈동자에 맺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은하는 비로소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느꼈다.

​징계나 협찬 같은 차가운 단어들이 사라진 자리에, 노란 캔커피처럼 따뜻한 온기가 스며들고 있었다.

​말이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은 늘 이렇게 고요하고도 집요하다.

​은하는 경위서 뭉치 귀퉁이에 삐뚤삐뚤하게 노란색 캔커피 하나를 그려 넣었다. 그것은 은하가 세상에 내놓은, 가장 용기 있는 두 번째 ‘오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