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장. 날개가 닳아가는 자리

​제4부: 봄의 소리

by 산 사람


​봄은 소리부터 다르게 찾아왔다. 아침이면 벌집 벽 너머로 언 땅이 풀리며 흐르는 물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는 낮게 깔려 길게 이어지며 대지의 기지개를 알렸다. 낮 기온이 며칠째 15도를 넘어서자, 따스한 햇살은 벌집 입구에 진득하게 머물며 일벌들의 날개를 유혹했다.

​조아는 익숙하게 바람의 결을 읽어내며 곧장 창공으로 몸을 던졌다. 더 이상 망설임은 없었다. 날개의 각도를 아주 미세하게 비트는 것만으로도 상승 기류를 탈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느끼고 있었다.

​“동쪽 산등성이가 먼저 피었어.”


​루나가 나직하게 방향을 짚어주자, 장난기 많은 벨라는 이미 하늘높이 치솟으며 소리쳤다.


​“높이 올라와서 보니까 진달래가 온통 분홍빛으로 번졌어! 조아, 오늘은 정말 멀리까지 가도 되겠어!”


​“멀리 가는 건 좋지만 천천히 움직여. 우선 벌집 기준점부터 정확히 잡자.”


​루나가 차분하게 벨라의 들뜬 기운을 눌렀고, 그 옆에서 티나가 가볍게 속도를 맞추며 거들었다.


​“오늘 바람은 참 순해. 우리를 밀어내지 않고 부드럽게 받쳐주네.”


​미나는 발밑을 조심스레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안도했다.


“거미줄도 보이지 않아… 다행이야.”

​조아는 미나의 말에 짧은 미소를 지었다. 공기가 차갑던 초봄, 낮게 날다 보이지 않는 실에 걸려 허공에 매달렸던 기억이 스쳤다. 날개가 묶인 채 다리를 휘저으며 공포에 떨던 그때, 허공을 가르고 나타나 거미줄을 끊어주었던 박각시의 굵은 날갯짓.


그가 남긴 “위로 날아라”라는 한마디는 조아의 비행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날 이후로 조아는 결코 낮게 날지 않았고, 꽃에 내려앉기 전엔 습관처럼 한 번 더 머리 위를 확인하곤 했다. 오늘도 조아는 진달래 위로 내려앉기 전, 짧게 솟구쳐 오르며 주변의 위험을 훑었다.

​“올해는 봄이 참 빠르게 오는 것 같아.”


​선배 벌들의 조언을 떠올린 티나가 꽃가루를 뭉치며 중얼거렸다.


​“겨울이 그토록 길고 매서웠는데도 말이야.”


​조아의 대답에 벨라가 가볍게 날개를 떨며 웃어 보였다.


​“겨울이 길고 깊었으니까, 그만큼 참고 참았던 생명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거겠지.”


​진달래 주위로 많은 꿀벌들이 꽃가루와 꿀을 채집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봄은 성큼 다가와 있었다.


​벌집 안은 숲보다 더 뜨겁게 들끓고 있었다. 부화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아 통로는 늘 일벌들로 북적였고, 저장방에는 금빛 꿀과 꽃가루가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공간이 비좁아지자 벨라가 몸을 비틀며 투덜거렸다.


​“이러다 정말 벌집이 터져나가는 거 아냐?”


​“터지는 게 아니라, 나뉘는 거겠지.”


​루나의 덤덤한 대답에 조아의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나뉜다는 것, 그것은 곧 이별을 의미했다.

​그때 알리다 선생님이 천천히 다가왔다. 예전보다 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진 그녀의 날개 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고, 투명했던 막은 세월의 풍파를 견딘 듯 군데군데 해져 있었다.


​“다녀왔느냐.”


​“네, 선생님. 동쪽 꽃들이 아주 상태가 좋아요.”


​조아가 꿀을 넘겨주며 답하자 알리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겹눈은 조아의 안정된 비행 자세를 가만히 훑어 내려갔다.


​“이제 네 날개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구나.”

​조아는 대답 대신 알리다와 눈을 맞췄다. 그 눈빛은 예전처럼 제자를 시험하는 날카로움이 아니라, 모든 것을 믿고 맡기는 듯한 아련한 평온함을 담고 있었다. 그때 통로 한쪽에서 길을 잃고 맴도는 어린 벌이 보였다. 조아가 먼저 다가가 다정하게 길을 일러주었다.


​“이쪽이야. 빛이 가장 환하게 들어오는 쪽이 우리가 나갈 입구란다.”


​어린 벌이 조아를 따라 길을 찾아가는 모습을, 알리다는 뒤편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요즘 산란이 부쩍 늘었어. 우리가 머물 공간이 하루가 다르게 좁아지고 있구나.”


​알리다의 말에 벨라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럼, 이제 정말 분봉 시기가 온 건가요?”


​“그래.”


​짧은 대답에 미나의 더듬이가 파르르 떨렸다.


“그럼… 누가 떠나게 되는 건가요?”


​“아직은 알 수 없지. 하지만 누구나 떠날 준비는 되어 있어야 한단다.”


​티나가 나직이 덧붙여 물었다.


“그럼 선생님은요?”

​알리다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날개를 한 번 크게 폈다 접었다. 메마른 밀랍이 부딪히는 듯한 미세한 마찰음이 났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이 날았구나.”


​그 말이 조아의 가슴속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산란이 늘고 집이 좁아지면 여왕은 무리의 절반을 이끌고 새로운 터를 찾아 떠나고, 남은 이들은 새 여왕을 세워 기존벌집의 세력을 잇는다. 그것이 벌들의 오랜 방식임을 알기에 슬픔은 더 깊었다.


​“그래도 선생님, 한 번쯤은 더 저희와 같이 날아주셔야죠.”


​벨라의 조심스러운 위로에 알리다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멀리 숲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허락해 준다면 그러고 싶구나.”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는 벌집 입구. 산등성이는 노을빛에 진달래보다 더 붉게 물들었고, 산수유 꽃들은 별처럼 반짝였다.


​“난 떠나는 쪽이 좋아. 답답한 집보다는 새로운 길을 찾는 게 더 설레거든.”


​벨라의 말에 루나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난 남는 쪽이 중요하다고 봐. 이 집의 좌표를 정확히 아는 벌이 있어야 군집이 유지되는 법이니까.”


​티나가 씩씩하게 말을 이었다.


“난 어디든 상관없어. 무리의 맨 앞에 서라면 기꺼이 설 거야.”


​미나는 친구들의 대화가 무서운 듯 작게 속삭였다.


“난… 우리가 흩어지는 것 자체가 싫어.”

​조아는 아무 말 없이 불어오는 저녁 바람을 맞았다. 입구 쪽에서 방향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는 어린 벌들을 향해 조아가 먼저 날아올랐다. 그녀는 짧게 원을 그리며 무리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모두 이쪽으로 모여. 내 날갯짓을 따라오렴.”


​길을 잃었던 어린 벌들이 조아의 주파수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정렬했다. 알리다는 그 광경을 한 걸음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더 이상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조아가 벌집 입구의 가장 앞에 서서 지는 해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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