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봄의 소리
밤은 조용했다. 낮 동안 들끓던 통로가 조용히 가라앉고, 저장방 깊은 곳에서만 미세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산란방에서는 새로 태어날 생명들의 일정한 숨결이 낮게 흐르고 있었다.
알리다는 입구에서 한 걸음 물러난 자리에 서 있었다. 예전에는 늘 가장 앞이었던 자리였다. 바람을 먼저 맞고, 방향을 가장 먼저 읽어내던 그 자리를 비워둔 채 그녀는 날개를 천천히 폈다. 달빛이 얇은 날개막을 스치자 고르지 못한 가장자리가 드러났고, 날개가 맞물릴 때마다 마른 낙엽 같은 소리가 났다.
그녀는 수명을 다한 날개를 다시 조용히 접었다. 입구 쪽에서 낮에 보았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린 벌들이 방향을 잃고 헤매자 조아가 망설임 없이 먼저 날아올랐다. 짧게 원을 그리며 무리의 위치를 잡아주던 조아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알리다는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벌집 깊은 곳에서 여왕의 묵직한 페로몬이 밀려왔다. 산란은 쉬지 않고 이어졌으며 군집의 공간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이미 새로운 방이 숨 가쁘게 준비되고 있었다. 벌집이 가득 차면 나뉜다. 오래된 여왕이 일부를 데리고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새로운 여왕이 선다. 그것은 터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갈라지는 자연의 섭리였다.
알리다는 그 과정을 여러 번 보아왔다. 그리고 이번에도 지켜보는 쪽에 서게 될 것이다. 입구에서 작은 기척이 났다. 조아였다.
“선생님.”
“왜 나와 있느냐.”
“바람이 낮과 달라서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밤바람은 낮보다 차갑고 날카로웠다. 조아가 말을 고르다 멈추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앞에 서는 자리는… 어떤가요.”
알리다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바람을 가장 먼저 맞는다.”
조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벌집 안쪽에서 어린 날개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곧 나뉘겠지요.”
“그래.”
짧은 대답뿐이었지만 조아는 더 묻지 않았다. 알리다는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더 물러섰다. 입구 앞에는 산 그림자가 길게 내려와 있었고, 조아는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바람이 가장 먼저 닿는 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조아가 입구의 맨 앞에 서서 밤의 공기를 맞았다. 알리다는 그 뒤에서, 움직임 없이 조아의 등을 지켜보았다.
밤바람은 낮의 다정함과는 달랐다.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 털 사이를 파고들었고, 조아의 더듬이는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묵직한 기압의 변화를 감지했다. 맨 앞에 선다는 것은, 무리가 잠든 사이 홀로 이 시린 감각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임을 조아는 비로소 느끼고 있었다.
알리다가 물러난 어둠의 깊이만큼 조아의 그림자는 입구 밖으로 길게 뻗어 나갔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알리다의 시선은 더 이상 따스한 보살핌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벽처럼 조아를 떠받치며, 동시에 벌집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이제 네가 바람의 주인이 되어라’라고 말하는 듯한 무거운 침묵이었다.
조아는 날개 근육을 미세하게 떨며 수평을 맞췄다. 어둠 속에서도 숲은 숨 가쁘게 살아 움직였다. 멀리서 소쩍새가 울었고, 이름 모를 짐승이 마른 잎을 밟는 소리가 전해졌다. 조아는 눈을 감았다. 시각이 사라진 자리에 더 예민한 감각들이 돋아났다. 공기 중에 섞인 습도, 나무줄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릿한 수액의 냄새, 그리고 내일 아침 대기를 흔들 폭풍의 전조까지.
가장 앞에 서 있는 자만이 읽어낼 수 있는 숲의 비밀스러운 신호들이 조아의 신경 끝에 전해졌다.
“선생님, 날개가 무겁습니다.”
조아가 허공을 응시하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알리다는 대답 대신 조아의 어깨 위로 자신의 낡은 다리를 한 번 지그시 눌렀다 떼었다. 그 묵직한 압력은 조아의 떨리는 날개를 바닥으로 가라앉히는 동시에,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지지대가 되어주었다.
조아는 다시금 바람을 향해 가슴을 폈다. 입구 너머, 아직 빛이 닿지 않은 어두운 숲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지켜내야 할 터전이었다. 내일 아침, 저 해가 떠오르면 벌집은 갈라질 것이고 누군가는 이 익숙한 입구를 등지고 영원히 떠나야 할 것이다.
조아는 더듬이를 길게 뻗어 밤공기의 끝을 더듬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숲 깊은 곳에서 날아온 낯선 이끼 향과 아주 먼 계곡에서 들려오는 물줄기의 낮은 진동이 날개 끝에 걸려들었다. 맨 앞에서 바람을 맞는 자만이 허락받은,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시간의 맛이었다. 고독은 차가웠으나, 그 끝에서 배어 나오는 숲의 비밀은 달콤했다.
달빛이 구름 뒤로 숨어들며 산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지만, 조아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알리다의 온기를 등 뒤의 이정표 삼아, 조아는 벌집의 파수꾼이 되어 밤의 끝자락을 묵묵히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