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장. ​분봉 : 남을 자와 떠날자

​제4부: 봄의 소리

by 산 사람


​새벽의 첫 햇살이 벌집 입구의 문턱을 조심스레 비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시작이었으나, 오늘만큼은 그 빛이 칼날처럼 차갑고 예리하게 느껴졌다. 밤새 벌집을 짓누르던 무거운 고요함은 태양의 등장과 함께 밀려났고,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전례 없는 미묘한 진동이었다.

​조아는 입구 한복판에 서서 밖을 내다보았다. 벌집 밖은 끝을 알 수 없는 초록의 바다와 눈부신 하늘이 펼쳐져 있었지만, 고개를 돌려 바라본 집 안은 수만 개의 육각형 방들이 정교하게 맞물린 밀랍의 요새였다. "이 완벽한 기하학의 성을 두고 떠나야 한다니..." 조아는 매끈한 육각형 벽면을 앞다리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벌들이 몸에서 분비한 밀랍으로 한 땀 한 땀 쌓아 올린 이 방들은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식량을 저장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요람이었다.

​뒤에는 알리다가 듬직한 그림자가 되어 서 있었다. 두 벌 사이로 흐르는 공기에는 평소의 달콤한 꿀 향기 대신, 코끝을 싸하게 만드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생존의 법칙에 따라 한 몸이었던 이 거대한 왕국은 두 개로 나뉘어 각기 다른 운명의 길을 걷게 될 것이었다.

​벌집의 가장 깊숙한 심장부인 여왕의 거처에서는 묵직한 페로몬이 안개처럼 바닥을 타고 내려와 벌들의 발끝을 적시고 있었다. 평소 군집을 하나로 묶어주던 그 향기는 오늘따라 어딘가 절박하고도 애틋하게 느껴졌다.


​"선생님, 여왕님은 정말로 이 정든 집을 두고 떠나시는 건가요? 저 육각형 방들에 가득 찬 꿀과 아기들도 다 두고..."


​조아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알리다는 조아의 어깨에 가만히 다리를 얹으며 나직하게 답했다.


​"조아야, 여왕벌은 자신의 몸에서 '여왕 물질'이라는 향기를 내뿜어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준단다. 하지만 이제 가족이 너무 많아졌어. 이 좁은 방들로는 더 이상 새 생명을 품을 수 없지. 그래서 오래된 여왕은 자신이 일군 이 왕국을 새 여왕에게 물려주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과 함께 지도에도 없는 미지의 땅으로 향하는 거란다. 그것이 종족을 번식시키려는 자연의 지혜이지."

​그때 통로 너머에서 익숙한 날개 소리가 들려왔다. 조아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인 루나, 벨라, 티나, 그리고 미나였다.


​"조아! 정말 우리가 이렇게 흩어져야 하는 거야? 꼭 그래야만 해?"


​미나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목소리로 물으며 조아의 앞다리를 꽉 붙잡았다. 조아는 미나를 다독이며 설명했다.


​"응, 미나야. 벌집 안이 너무 뜨거워졌어. 수만 마리의 벌이 내뿜는 열기를 이 육각형 통로들이 더 이상 식혀주지 못해. 누군가는 새로운 길을 열어 집을 나누어야 해. 그래야 남은 아이들도, 떠나는 우리도 숨을 쉴 수 있거든."


​조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라가 날개를 거세게 떨며 외쳤다.


​"난 떠나는 쪽에 설 거야! 저기 밖을 봐, 끝없는 초록색 숲이 우리를 부르잖아! 새로운 꽃밭을 찾는 게 훨씬 가슴 뛰는 일이잖아!"


​그 모습을 본 루나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벨라, 밖은 위험천만한 곳이야. 변덕스러운 바람과 굶주린 새들이 도사리고 있지. 하지만 남는 쪽도 쉬운 건 아니란다. 텅 빈 이 방들을 다시 채우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 여왕을 보필해야 하니까. 나는 이곳에 남아 우리의 집을 지키겠어."


​루나와 티나는 남는 쪽을, 벨라와 미나는 조아를 따라 떠나는 쪽을 택했다.

​알리다는 서로의 운명을 정하는 어린 벌들을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너희 몸속에는 이미 그 답이 새겨져 있단다. 비행 근육이 강한 젊은 벌들은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떠나고, 살림의 지혜를 가진 벌들은 남겨진 자원을 지키는 법이지."


​조아는 이별의 무게를 실감하며 물었다.


​"선생님은요? 선생님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알리다는 대답 대신 입구 밖, 아스라이 보이는 먼 숲의 끝을 응시했다.


​"나는 바람이 허락하고, 너희의 날갯짓이 닿는 곳까지 함께 갈 것이다."

​벌집 깊은 곳에서 땅이 울리는 듯한 거대한 진동이 터져 나왔다. 여왕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천 마리의 일벌이 약속이라도 한 듯 흥분하여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입구 쪽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떠날 자들은 위장에 노란 꿀을 한가득 채워 넣었다. 새로운 집을 지을 밀랍을 만들 에너지를 몸속에 담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여행을 위한 마지막 성찬이었다. 조아는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꿀의 진한 달콤함을 느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고향집의 마지막 맛이었다.

​조아는 맨 앞에 서서 루나와 티나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벌집 입구는 이제 거대한 생명의 분화구가 되었다. 수만 마리의 일벌이 내뿜는 열기와 날갯짓 소리는 대기를 진동시키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서막과 같았다. 조아는 위장 가득 채운 꿀의 묵직한 무게감을 느끼며 입구의 거친 나무 질감을 마지막으로 붙잡았다.


​"루나, 티나... 정말 고마웠어. 너희가 이 집을 잘 지켜줄 거라 믿어."


​조아의 떨리는 목소리에 루나가 다가와 더듬이를 맞대었다. 그것은 벌들만이 나누는 가장 깊은 신뢰의 인사였다.


​"걱정 마, 조아. 우리는 이곳에서 새로운 여왕님과 함께 태어날 아기들을 돌볼게. 너희는... 부디 안전한 곳에 도착해야 해. 바람을 조심해."


​루나의 목덜미가 가늘게 떨렸다. 곁에 있던 티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입구 쪽으로 물러났다. 남겨진 자들은 이제 떠날 자들을 위해 길을 비켜주어야 했다.


​"조아, 나 너무 무서워. 정말 이 허공으로 뛰어내려야 하는 거야?"


​미나가 겁에 질린 채 조아의 날개 밑으로 파고들었다. 벨라는 벌써부터 날개를 파르르 떨며 공중에 뜰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미나야, 내 날개 소리만 들어. 우린 절대 떨어지지 않아. 알리다 선생님도 함께 계시잖아."


​조아가 미나를 다독이는 순간, 벌집 깊은 곳에서 여왕의 묵직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출정'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때였다. 폭발적인 진동과 함께 황금빛 벌 떼가 허공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아는 온 힘을 다해 뒷다리로 바닥을 밀며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지금이야! 모두 날아올라!"


​조아의 외침과 함께 벨라와 미나, 그리고 수만 마리의 일벌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공중으로 나온 벌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스웜(Swarm)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구조는 매우 정교했다. 수만 마리의 벌이 공중에서 서로의 위치를 파악하며 여왕을 중심에 두고 거대한 구형의 대열을 형성했다. 바깥쪽의 벌들은 바람의 저항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하고, 안쪽의 벌들은 여왕의 비행 속도를 조절하며 완벽한 보호막을 만들었다.


​"대열을 유지해! 여왕님을 중심으로 뭉쳐야 해!"


​알리다 선생님의 날카로운 지시가 기류를 타고 전달되었다. 조아는 미나의 위치를 확인하며 소용돌이치는 황금빛 구름의 한 축이 되었다.

​벌집 입구에 남겨진 루나와 티나의 시야에 비친 것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일렁이는 거대한 황금색 고리였다. 수만 개의 날개가 햇살을 반사하며 마치 하늘에 뿌려진 금가루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잘 가, 친구들아..."


​루나의 작은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조아와 친구들은 정든 벌집을 떠나 첫발을 내디뎠다. 허공으로 떠오른 그들의 발밑에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과거가, 머리 위에는 생존을 건 미래가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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