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봄의 소리
루나, 티나와 헤어져 수많은 자매벌이 여왕과 함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 지 벌써 이틀이 흘렀다. 정든 벌집을 떠날 때의 장엄했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이제 군집에는 지독한 피로와 허기만이 감돌았다.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은 숲 어귀의 높은 참나무 가지였다. 어린 벌들과 나이가 지긋한 알리다는 체력을 아끼기 위해 여왕벌을 중심으로 서로의 몸을 단단히 연결했다. 수만 마리의 벌이 겹겹이 층을 이룬 모습은 마치 나무에 매달린 거대한 황금색 열매 같았다. 둥근 원형의 스웜 클러스터(Swarm Cluster)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체온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방어 수단이었다.
이때 벌들은 서로의 다리를 갈고리처럼 걸어 단단한 '생체 사슬'을 만들어, 안쪽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 여왕벌의 비행 근육이 식지 않도록 보호하는 생존 전략이었다.
"조아, 너무 추워... 뱃속이 텅 빈 것 같아."
곁에 있던 미나가 가늘게 떨리는 날개를 비비며 속삭였다. 조아는 미나의 몸을 더 깊숙이 안쪽으로 밀어 넣으며 대답했다.
"조금만 참아, 미나야. 정찰벌들이 곧 좋은 소식을 가져올 거야."
하지만 희망은 사치였다. 젊은 벌들이 끊임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새로운 정착지를 탐색했지만, 그들이 돌아와 전하는 소식은 절망뿐이었다. 이틀 사이에 벌써 세 번이나 자리를 옮겨야 했다. 떠나올 때 꿀주머니에 가득 채워온 꿀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벌들에게 꿀은 단순한 식량이 아니라 날개를 움직이는 연료였기에, 꿀이 고갈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설상가상으로 밤사이 내린 차가운 비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었다. 빗방울은 외벽을 감싼 벌들의 숨구멍을 막았고, 젖은 날개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조아와 친구들은 알리다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 이대로는 모두가 몰살당할지도 몰라요. 어떻게 해야 하죠?"
알리다는 힘겹게 날개를 떨며 답했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군집의 체력이 완전히 고갈되기 전에 보금자리를 찾는 것. 조아야, 다시 한번 날아올라야 한다."
조아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허공으로 솟구쳤다. 날개 끝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남겨진 친구 티나를 생각하며 버텼다. '티나, 너는 잘하고 있겠지? 우리도 꼭 살아남을게.'
하지만 조아가 마주한 세상은 암울했다. 한때 울창했을 산은 산불로 인해 검게 타버린 폐허가 되어 있었고, 무참히 베어진 나무들이 흉물스럽게 쓰러져 있었다. 꽃 한 송이 보이지 않는 검은 대지는 벌들에게는 거대한 무덤과 같았다. 조아는 새삼 자신이 살던 벌집이 얼마나 평온하고 아름다운 낙원이었는지 깨달았다.
조아는 타버린 숲의 매캐한 재 냄새를 뚫고 참나무 위 무리로 돌아왔다. 이미 그곳에는 먼저 돌아온 다른 정찰벌들이 어지럽게 원을 그리며 각자의 정보를 쏟아내고 있었다. 춤판은 평소처럼 즐거운 축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종족의 생존을 건 처절한 토론장이었다.
한 정찰벌이 클러스터 표면에서 격렬하게 몸을 흔들며 8 자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 벌은 태양의 각도와 비행 거리를 암호처럼 내뱉으며 서쪽 절벽의 작은 바위틈을 보금자리로 제안했다. 하지만 조아는 보았다. 그 벌의 날개가 찢겨 있고, 몸에는 검은 재가 잔뜩 묻어 있다는 것을. 서쪽 역시 산불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곳이었다.
"그곳은 안 돼! 꽃 한 송이 남지 않은 죽은 땅이야!"
조아가 날개를 떨며 경고의 진동을 보냈다. 하지만 다른 정찰벌들도 각자의 절망을 가져왔을 뿐이었다. 어떤 이는 습기가 너무 많은 썩은 고목을, 어떤 이는 인간의 소음이 가득한 위험한 처마 밑을 제안했다. 이틀 동안 이어진 세 번의 이동으로 모두의 판단력은 흐려져 있었고, 꿀주머니의 꿀이 바닥날수록 소통의 진동은 점점 약해져 갔다.
알리다 선생님은 이 혼란을 조용히 지켜보며 조아에게 다가왔다.
"조아야, 정찰벌의 소통은 단순히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란다. 그것은 수만 마리의 생명을 책임질 '합의'의 과정이지. 모두가 절망을 노래할 때, 너는 희망의 냄새를 찾아내야 한다."
조아는 알리다의 말을 되새기며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피로에 젖은 날개는 무거웠고 기운은 없었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군집 전체가 몰살당할 것이라는 공포가 조아를 일으켜 세웠다. 조아는 친구 벨라와 미나를 불러다.
"벨라, 넌 북쪽의 기류를 타. 미나, 넌 나와 함께 태양이 비치는 동쪽 언덕을 가로지르자. 분명 어딘가에 우리를 받아줄 살아있는 땅이 있을 거야."
조아는 마지막 남은 기력을 쥐어짜 날개에 힘을 주었다. 이제 정찰은 단순한 탐색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사투였다.
정찰벌들의 엇갈린 보고 속에서 조아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서쪽 절벽은 이미 잿더미가 되었고, 북쪽은 차가운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조아는 떨고 있는 미나의 날개를 자신의 다리로 굳게 붙잡았다.
"모두 조금만 힘을 내죠. 우리는 동쪽으로 간다. 그곳에 아직 타지 않은 생명의 땅이 있을 거야."
조아의 외침과 함께 미나와 소수의 정찰 부대가 다시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하지만 동쪽 또한 참혹했다. 한때 울창한 밀원이었을 산등성이는 산불이 훑고 지나가 검은 유령들의 숲으로 변해 있었다. 타버린 나무들은 잎사귀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앙상한 뼈대만 드러냈고, 매캐한 연기는 벌들의 예민한 숨구멍을 괴롭혔다. 조아는 평소 벌집 안에서 누렸던 평온함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조아, 기운이 없어서 더는 못 날겠어..."
미나의 비행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떠나올 때 꿀주머니에 채운 꿀은 에너지가 되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날개를 움직일 근육의 동력이 사라지고 있었다.
꿀이 완전히 고갈되자 근육은 비명을 질렀고, 시야는 자꾸만 흐릿해졌다. 그때, 회색빛 재로 뒤덮인 대지 한가운데에서 믿을 수 없는 빛깔이 조아의 겹눈에 포착되었다. 그것은 모든 것이 타버린 지옥 같은 풍경 속에서 홀로 고개를 치켜든 작은 분홍색 야생화 무리였다.
"미나야! 저기 좀 봐!"
조아의 외침에 지쳐 추락하듯 날던 친구들이 고개를 들었다. 그 작은 꽃송이는 마치 온 세상을 향해 살아남았다고 외치는 것처럼 강인해 보였다. 조아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그곳으로 향했다. 꽃잎에 발을 내디뎠을 때, 꽃이 전해주는 미세한 생명력은 조아의 온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곳엔 수만 마리의 군집을 먹여 살릴 만한 꿀은 없었다. 단 몇 마리의 갈증을 겨우 달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잠시 숨을 돌린 조아와 일행들은 군집이 머무는 참나무로 돌아갔을 때, 그곳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다른 정찰벌들이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인간의 소음이 가득한 위험한 공사장의 배수관을 보금자리로 제안하며 격렬한 춤을 추고 있었다. 그곳으로 간다면 군집은 당장의 비바람은 피할지 몰라도, 인간의 약품이나 소음으로 인해 서서히 몰살당할 것이 뻔했다.
조아는 클러스터의 중앙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배운 모든 기술을 동원해 날개를 떨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히 위치를 알리는 춤이 아니었다. 잘못된 선택을 막으려는 리더의 간절한 호소였다.
"그곳은 죽음의 구멍이야! 내가 본 꽃을 믿어줘! 동쪽 언덕 너머에 반드시 생명의 땅이 있어!"
다른 정찰벌들이 조아의 몸을 밀치며 방해했지만, 조아는 굴하지 않고 더욱 강한 진동을 내뿜었다. 조아의 가슴 근육에서 발생하는 열기가 주변 벌들에게 전달될 정도였다. 알리다 선생님이 가르쳐준 대로, 조아는 자신의 공포를 용기로 치환하며 군집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마침내 정찰벌들의 춤이 하나둘 멈추고, 조아의 진동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아가 진정한 리더로서 군집의 신뢰를 얻어내는 순간이었다.
군집은 조아의 방향을 믿고 다시 한번 대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태양 빛을 따라 동쪽으로 날아갈수록 조아의 날개는 점점 무거워졌다. 수색을 거치는 동안 자신의 체력 한계를 이미 넘어서 버린 상태였다. 날개는 이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허공으로 들려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정신이 몽롱해졌다.
'미나... 조금만 더... 보금자리를 찾아야 해...'
조아는 흐릿해지는 정신을 다잡으며 마지막 날갯짓을 했다. 꿀주머니에 남은 마지막 당분까지 모두 불태운 조아의 몸이 서서히 지면을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지금껏 맡아본 적 없는 강렬하고 풍성한 꽃향기가 조아의 더듬이를 때렸다. 그리고 그 너머로, 조아는 보았다. 수천 가지 색깔의 꽃들이 수놓아진 신비로운 정원과 그 너머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듯한 '거대한 존재'의 형체를.
조아의 비행은 이제 날갯짓이라기보다 처절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뱃속의 연료는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고, 근육은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을 내뱉고 있었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던 순간, 코끝을 찌르는 강렬한 향기가 조아의 더듬이를 강하게 때렸다.
'저기... 저기까지만 가면...'
조아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가장 먼저 보이는 꽃잎 위로 추락하듯 내려앉았다. 꽃은 싱싱하고 향기로웠으나, 지친 조아에게 허락된 꿀은 너무나 적었다. 결국 조아는 날개를 축 늘어뜨린 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정신이 희미해지며 '이제 마지막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몸이 허공으로 둥실 들려가는 생소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입술 사이로 따뜻하고도 달콤한 액체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꿀은 아니었으나 꿀만큼이나 달콤하고 향긋한 그 맛에 조아는 본능적으로 입을 움직였다. 액체가 몸 안으로 스며들자마자 기적처럼 힘이 솟구쳤다. 접혔던 날개가 펴지고 다리에 힘이 실리자 조아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그곳에는 거미보다 크고 각시벌레보다도 거대한, 생전 처음 보는 형체가 조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개도 더듬이도 없는 기이한 생명체, 바로 인간이었다.
"정신이 드나 보구나. 다행이다."
인간의 목소리는 알리다 선생님의 피부처럼 거칠고 낡았다. 주름진 얼굴과 희미하지만 따뜻한 안광을 지닌 그는 조아를 조심스레 들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그에게서는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이 조아를 내려놓은 곳은 이전 벌집과는 사뭇 다른, 매끄럽고 정갈하게 정돈된 벌집의 입구 앞이었다.
입구에 발을 내딛자마자 익숙하고도 그리운 밀랍의 향기가 조아의 감각을 사로잡았다. 조아는 홀린 듯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은 나무속 자연 벌집과 달리, 밀랍으로 기초를 잡아둔 벌집이 층층이 들어차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느껴지는 공기의 흐름은 너무나 따뜻하고 쾌적했다. 이전의 나무 틈새 벌집은 습기가 차고 통풍이 어려웠으나, 이곳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정교하게 짜인 밀랍 판들이 따뜻하면서도 아늑한 공기를 품고 있었다. 벽면은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고, 벌들이 이동하기 편하도록 완벽한 간격이 유지되어 있었다.
특히 위쪽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한 꿀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와, 꿀이다!"
조아는 허겁지겁 저장고에 가득 찬 꿀을 먹기 시작했다. 체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본능 외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그곳은 포근하고 아늑했다. 비좁았던 옛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공간이었다. 조아의 눈에 비친 내부 공간은 빈방들이 끝없이 이어진 육각형의 공간이었다. 산란방과 저장방이 질서 정연하게 나뉘어 있었고, 무엇보다 천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도록 입구가 견고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이런 곳이라면... 여왕님과 우리 자매들이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조아의 가슴은 희망으로 벅차올랐다. 조아는 서둘러 빛이 들어오는 입구로 나갔다. 군집의 생존을 위해,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을 알리다 선생님과 여왕님께 이곳을 알려야만 했다. 입구에 나선 조아는 매끄러운 바닥에서 힘차게 날개를 펼쳤고, 주변의 꽃들과 위치를 머릿속에 각인하며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조아는 돌아가기 전 입구 주변을 맴돌며 이곳의 위치를 기억했다. 이 벌집이 정원의 어떤 꽃나무 옆에 있는지, 태양의 각도는 어느 정도인지 복잡한 뇌 지도를 그렸다.
이제 조아는 따뜻한 희망을 안고, 자신이 왔던 방향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날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