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우연은 늘 말 많은 사람이 데려온다

연작소설 — 말이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

by 산 사람


​우연은 언제나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 가장 먼저 무례하게 말을 건다. 그리고 그 말은, 가장 말이 많고 가장 참견하기 좋아하는 얼굴을 하고 찾아오기 마련이다.


​윤재훈이 그 지독한 진리를 깨달은 건, 구청 광장에서 열린 ‘시민의 날 소통 간담회’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 간담회 옆에 덤처럼 딸려 온 무료 커피 트럭 때문이었다. 재훈에게 간담회는 중요하지 않았다. 시민이 소통을 하든 고통을 호소하든, 그의 하루는 늘 같은 방식으로 닫히고 열렸으니까. 다만 ‘무료’라는 단어는, 박봉의 계약직 인생에서 언제나 최우선적인 의사결정의 기준이 되곤 했다.


​“야, 공짜 커피야. 이건 안 마시면 세금 내는 국민으로서 직무유기지. 국가 재산 낭비라고!”


​박미정은 이미 트럭 앞에서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서 있었다. 세상 모든 무료 시식 코너를 자기 영토처럼 점령하는 정복자의 자세였다. 재훈은 그 뒤에 반 박자 늦게 섰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서는 건 여전히 피부가 따가운 일이었지만, 요즘 그는 예전보다 조금 덜 뒤로 물러서는 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고개 각도는 30도. 스스로 정한 타인의 무례는 막아내되 자신의 존엄은 바닥에 흘리지 않는 최소한의 각도였다.


​“아이스로요?”

“네.”

“시럽은?”

“반만요.”


​그 대답이 끝나자마자, 미정이 툭 던졌다.


“야, 시럽 반은 무슨 이도 저도 아닌 심리냐? 달달한 거 좋아하면서,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지는 것 같은 묘한 자존심? 너 인생을 왜 그렇게 하이브리드로 살아?”


​“… 그냥 너무 달면 물리고, 너무 안 달면 쓰니까요. 딱 그 중간이 안전하잖아요.”


​“봐라. 인생 전반에 적용되는 비겁한 논리. 너무 달면 물린다? 재훈아, 너는 아직 인생의 단맛 근처에도 못 가봤어. 설탕 봉지 만져보지도 않았으면서 물릴까 봐 겁부터 내는 건 병이야, 병.”


​재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트럭 옆에 세워진 임시 플라스틱 의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광장 앞쪽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정확히 말하면, 소란을 가장한 아주 세련되고 정돈된 소음. 마이크 테스트 특유의 ‘치직’ 거리는 소리, 스태프들이 긴박하게 주고받는 짧은 지시,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들려오는... 지독하게 익숙한 음색.


​“… 여기 음향 다시 한번만 체크할게요. 공간이 넓어 소리가 너무 퍼져요.”


​재훈은 커피를 쥐려던 손을 멈추고 광장앞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목소리는 차가운 액정 너머, 밤의 주파수 속에서만 존재해야 할 목소리였다. 밤에만 허용된, 낮에는 절대 만나면 안 될 것 같은 은밀한 목소리.

​서은하였다.


​그녀는 지금, 마이크를 쥐고 무대 중앙에 서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녀 주위로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말하는 사람 특유의 자세. 중심이 앞으로 쏠리지 않고, 언제든 물러설 준비가 된 우아하고도 서늘한 분위기.


​재훈은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라디오로만 듣던 사람을 대낮에 구청 광장에서 마주치는 건, 밤새 쓴 연애편지를 길 한복판에서 낭독당하는 기분과 비슷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한 그녀지만, 물리적으로는 단 한순간도 알지 못하는 불균형. 재훈은 그 불균형이 두려워 발 끝만 보았다.


​“어? 야, 저 여자…!”


미정의 레이더가 가동됐다.


“저 DJ 아니야? 며칠 전에 네가 들이받은 그 여자. ‘오답 선언’의 주인공!”


​재훈의 심장이 한 박자 늦게, 하지만 아주 크게 요동쳤다.


“… 조용히 좀 해요. 제발.”


“왜? 네가 그렇게 용감하게 ‘틀렸습니다’라고 했다며. 그럼 가서 ‘내가 그 오답이다’라고 정식으로 인사라도 하든가.”


“아는 사람 아니에요. 주파수로만 아는 사이지.”


“아니긴. 네 눈빛이 지금 전 주파수를 동원해서 고백 중인데?”


​미정은 지금 상황을 집요하고도 심술궂게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언제나 남의 인생이라는 영화에 예고 없이 출연하는 카메오이자, 동시에 사건을 터뜨리는 폭탄이었다.


​그때, 무대 위에서 문제가 터졌다. 서은하가 쥐고 있던 무선 마이크가 거친 잡음을 내더니 완전히 먹통이 된 것이다. 스태프들이 당황해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DJ님, 배터리 문제가 아니라 수신기 자체가 죽은 것 같아요. 유선 마이크 차에 있는데 가져오려면 한참 걸려요!”


​서은하는 당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미간에 아주 작은 주름이 잡혔다. 7년 차 DJ의 자부심이 훼손되는 순간의 미세한 흔들림.


​“그냥 생목소리로 할까요? 광장이 넓지 않아서, 다 들리긴 할 텐데.”


​그녀가 제안할 때, 박미정이 재훈의 등을 사정없이 쿡 찔렀다.


“야, 너 가방에 그거 있잖아. 민원 홍보용 장비.”


“… 안 돼요. 이건 개인 장비도 아니고.”


“아니긴, 네가 새로 산 거 내가 다 봤어. 가서 말해. 마이크 대신 이거라도 쓰라고. 가서 네가 그 ‘오답’이라는 걸 증명하라고!”


​미정은 재훈의 등을 사정없이 밀었다. 밀리는 힘은 크지 않았지만, 재훈은 저항할 수 없었다. 우연은 늘 이렇게,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의 손을 빌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오는 법이니까.

​재훈은 떠밀려 무대 근처까지 나갔다. 은하와 시선이 마주쳤다. 라디오 주파수라는 장벽이 사라진, 단 2미터 거리의 생생한 시선. 그 순간 재훈은 자신이 평생 숨겨온 침묵을 들켜버린 것 같아 숨이 막혔다.


​“저기요.”


​재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명확했다. 은하가 고개를 돌렸다.


“네?”


​“혹시… 임시로 이거 쓰셔도 됩니다. 이어폰 마이크인데, 수신 거리는 짧아도 사람 목소리는… 꽤 정확하게 담기거든요.”


​재훈은 가방에서 꺼낸 작은 장비를 내밀었다. 민원실에서 인터뷰용으로 쓰려고 사두었던, 투박하지만 성능 좋은 마이크였다. 낯선 남자, 하지만 어딘가 낯설지 않은 태도. 정중하게 선을 긋고 있지만, 선 안쪽에서 묘한 온기를 품고 있는 눈빛.


은하가 재훈의 손에 들린 마이크 본체를 건네받으려던 순간, 그녀의 시선이 기기 하단에 붙은 낡은 견출지에 머물렀다. 그곳엔 정갈한 손글씨로 라벨이 붙어 있었다. 은하는 숨을 들이켰다. 며칠 전, 서버 깊숙한 곳에서 겨우 찾아냈던 그 [3번 창구].


은하는 마이크를 쥐는 대신, 남자를 빤히 바라봤다. 남자는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습관처럼 고개를 미세하게, 딱 30도만큼만 정중히 숙여 목례했다. 오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오직 그만이 가진 고유한 각도였다.


​“이걸요? 윤재훈 씨…?”


은하의 입술을 타고 ‘윤재훈’이라는 석 자가 흘러나온 순간, 누군가에게 급소를 찔린 듯 당황한 재훈의 눈동자가 떨렸다.


“제 이름을… 어떻게...?”


은하는 소리 없이 미소 지으며 하얀 손가락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재훈의 가슴팍, 그가 미처 가리지 못한 푸른색 구청 명찰을 가리켰다.


“여기 있네요. 윤재훈 씨라고.”


​재훈은 멈췄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서부터 기분 좋은 미열이 번져 나왔다. 아나운서 서은하가 아닌, 사람 서은하가 건네는 다정한 웃음이 재훈의 팽팽했던 긴장감을 단번에 녹여 내렸다. 적대감도, 조롱도 없는 그 맑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재훈은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으면서도, 낯선 설렘이 그의 가슴을 간질였다. 이름표가 유난히 뜨겁게 느껴졌다.


​“ 아... 네...

제 장비니까 편하게 쓰셔도 됩니다. 방송용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마이크가 죽었을 땐… 심폐소생술 정도는 될 겁니다.”


​은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정오의 햇살에 녹아버린 초콜릿 같은 웃음이었다.


“심폐소생술이라. 지금 저한테 딱 필요한 단어네요. 고맙습니다, 윤재훈 씨.”


​은하는 자연스럽게 재훈의 손에서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순간 손가락이 스쳤다. 아주 짧은 접촉이었지만, 재훈은 그 온기가 오후 내내 손끝에 머물 것을 직감했다.

은하의 목소리는 재훈의 마이크를 타고 강당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재훈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박미정은 옆에서 팔짱을 낀 채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 너 봤지? 네 마이크 타고 그 여자 목소리 나가는 거. 그게 바로 ‘간접 키스’보다 진한 ‘간접 대화’라는 거다.”


“… 말 좀 예쁘게 하세요.”


“말은 예쁘게 하는 게 아니라 정확하게 하는 거야. 너 오늘 저 여자한테 이름 석 자 확실히 각인시켰어. ‘오답’에서 ‘구원자’로 등급 업 한 거라고.”


​행사가 끝나고 장비를 반납하러 은하가 재훈을 다시 찾았다. 그녀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유해져 있었다.


​“윤재훈 씨,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오늘 방송사고 면했네요.”


“아닙니다.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할 일요? 구청 공무원이 DJ 마이크 챙겨주는 게 매뉴얼에 있나요?”


“… 매뉴얼에는 없지만, 며칠 전 오답에 대한… 제 나름의 정답입니다.”


순간 은하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재훈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낮게 웃었다.


“아… 그 오답. ‘오늘은 DJ님 말이 틀렸습니다’라고 보낸 사람. 맞죠?”


재훈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30도의 각도.


“네. 저....”


​짧은 정적이 흘렀다. 정오의 시끄러운 강당이 갑자기 심야 12시의 라디오 부스처럼 조용해졌다.


은하는 떨리는 마음을 누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윤재훈 씨 연락처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정식으로 사례도 하고 싶고, 또... 다음 방송에 대해 물어볼 게 있어서요.”


재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머뭇거리다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주파수 너머에서 듣는 게 더 편합니다. 사례는 아까 웃어주신 걸로 충분합니다.”


은하는 아쉬운 듯 입술을 축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오늘 밤, 제가 준비한 정답이 또 틀렸는지 들어주러 오시는 거죠?”


​“이렇게 뵙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요...

낮에 만난 오답은… 생각보다 훨씬 정중하시네요. 밤에는… 더 뜨거우시고요.”


​은하가 장난스럽게 마이크를 재훈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이 말, 오늘 오프닝으로 써도 될까요? ‘낮에 만난 오답’이라는 표현, 꽤 마음에 드는데.”


“대신… 저인 거 비밀로 해주신다면요.”


“약속할게요. 대신, 오늘 밤에도 꼭 들으러 와주세요. 제가 오늘 밤엔 어떤 정답을 준비했을지 확인하러.”


​은하는 가벼운 손인사를 남기고 방송국 차에 올랐다. 재훈은 멀어져 가는 차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미정이 옆에서 어깨를 툭 쳤다.


“야, 윤재훈. 점심시간 끝났다. 국가 공무원이 사랑 타령할 시간 없어. 민원인들이 네 사과 기다리고 있다고.”


​재훈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오후의 민원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소란스러웠지만, 재훈의 안에서는 아주 작은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심야 12시. 도심의 소음이 빠져나간 자리에 오직 차가운 가로등 불빛과 정적만이 고였다. 재훈은 낡은 연립주택 옥상 평상에 앉아 있었다. 낮에 은하의 손길이 잠시 머물렀던 마이크 장비는 깨끗이 닦여 가방 안에 놓여 있었고, 재훈의 손바닥에는 기분 좋은 미열이 남아 있었다.

​이어폰을 타고 익숙한 시그널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낮에 보았던 그 선명한 얼굴이 겹쳐지는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부조정실에서는 지수가 태블릿 모니터를 응시하며 은하에게 신호를 보냈다.


[선배, 그 ‘3번 창구’ 아이디 접속했어요! 그 사람이에요!]


지수의 메시지를 확인한 은하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이제 주저함 없이 오프닝 멘트를 던졌다.


​“오늘 낮, 예정에 없던 외출을 다녀왔습니다. 화려한 스튜디오 조명 대신 쏟아지는 정오의 햇살 아래 섰을 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마이크가 죽어버린 무대 위에서 제가 얼마나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는지.”


​은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았고, 조금 더 떨리고 있었다. 재훈은 무의식적으로 이어폰을 귀에 더 밀착시켰다. 옥상의 밤바람이 재훈의 셔츠 깃을 건드렸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당황한 제 앞에, 누군가 투박한 마이크 하나를 건넸습니다. 세련된 방송용 장비도 아니었고, 화려한 수식어도 없었죠. 그저 '심폐소생술 정도는 될 겁니다'라고 말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던 그 사람의 각도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30도. 무례하지도,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진심이 담긴 각도였거든요.”


​재훈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약속대로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오직 재훈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은밀한 언어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옥상 너머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의 불빛이 재훈의 눈동자 속에서 잘게 부서졌다. 재훈은 자신의 손가락 마디를 만지작거렸다. 낮에 스쳤던 그녀의 온기가 그 마디마디에 각인된 것 같았다.


​“그 마이크를 타고 나간 제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거칠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투박한 선을 타고 제 진심이 누군가의 정답이 아닌, 가장 따뜻한 오답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요. 약속했거든요. 오늘 밤, 그 오답을 확인하러 와달라고요. 지금 듣고 계신가요? 제 마이크를 살려준, 나의 정중한 오답님.”


​재훈은 헛기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낡은 옥상 바닥에 놓인 노란 캔커피 위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서울의 밤하늘이었지만, 은하의 목소리가 흐르는 주파수만큼은 은하수처럼 찬란하게 옥상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은하의 방송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오늘 사연을 읽는 내내 평소보다 자주 멈췄고, 자주 웃었다. 그것은 대본에 적힌 '비즈니스용 웃음'이 아니라, 누군가와 비밀을 공유한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천진한 즐거움이었다. 재훈은 그 웃음소리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수집하듯 들었다.

​방송이 끝나고 마지막 곡이 흐를 때쯤, 재훈은 휴대폰을 꺼냈다. 메시지 창을 열고 한참을 망설였다. 자판 위에서 머뭇거리던 손가락이 이내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 오늘은 DJ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마이크, 잘 쉬고 있습니다. ]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재훈은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심장 소리가 옥상의 정적보다 더 크게 들렸다.

​잠시 후, 라디오에서 음악이 잦아들며 은하의 마지막 멘트가 흘러나왔다.


​“방금, 제 마이크가 잘 쉬고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네, 저도 이제 편안히 쉴 수 있을 것 같네요. 오늘 밤, 여러분의 주파수는 평안하신가요? 지금까지 서은하였습니다. 내일도, 여기서 기다릴게요.”


​라디오에선 익숙한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왔다. 국화꽃 향기의 OST 성시경의 <희재>였다. 은하의 마지막 인사가 전주 사이로 흩어졌다. 재훈은 그 노래가 마치 자신에게 건네는 자장가처럼 들렸다.


"내일도, 여기서 기다릴게요."라는 은하의 목소리가 노래의 첫 소절인 '햇살은 우릴 위해 내리고...'와 겹쳐질 때, 재훈은 비로소 깊은 잠에 들 준비를 마쳤다.


​시그널 음악이 완전히 사라지고 이어폰에서 치직거리는 백색 소음만이 남았을 때, 재훈은 비로소 깊은숨을 내뱉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우연은 말이 많은 박미정이 데려왔지만, 그 우연을 필연으로 완성한 건 은하의 용기였다. 재훈은 옥상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평소라면 무섭게만 느껴졌을 어두운 골목길이, 오늘 밤엔 왠지 다정한 문장들로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재훈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30도.

이 각도가 누군가에게는 세상을 살리는 심폐소생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심폐소생술로 인해 가장 먼저 살아난 것은, 다름 아닌 재훈 자신의 멈춰있던 마음이었다. 재훈의 방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새벽까지 꺼질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