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익명의 온도, 3번 창구의 그림자

연작소설 — 말이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

by 산 사람


​라디오 부스의 붉은 ‘ON AIR’ 등이 꺼지고, 남는 것은 지독한 정적과 마시다 남긴 종이컵의 비릿한 온기뿐이었다. 은하는 헤드셋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환청처럼 그 짧은 문장이 계속 맴돌았다. ‘틀렸습니다.’ 세상 모두가 정답이라고 손뼉 칠 때, 유일하게 자신의 오답을 짚어준 그 낯선 주파수.


​은하는 스튜디오 밖으로 나오자마자 편집실 구석에서 원고를 정리하던 막내 작가 지수에게 다가갔다. 지수는 갑작스러운 은하의 접근에 놀란 듯 토끼 눈을 뜨고 쳐다봤다.


"지수야, 혹시 그 문자... 번호 좀 알 수 있을까? '틀렸습니다'라고 보냈던 사람 말이야."


​지수의 표정이 금세 곤혹스럽게 변했다.


"선배, 아시잖아요. 방송국 개인정보 보호 규정 엄청 까다로워진 거. 작년에 보안 사고 터지고 나서 저희 작가들도 청취자 연락처 함부로 못 봐요. 시스템에 접근하려면 피디님 승인 코드도 필요하고요."


​"그냥... 고맙다는 인사라도 전하고 싶어서 그래. 그 사람 아니었으면, 난...

할머니를 안아주지 못했을 거야."


​은하의 목소리는 평소의 서늘한 자신감 대신, 간절한 습기가 배어 있었다. 지수는 한숨을 내쉬며 태블릿 PC를 켰다.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적을 잘게 쪼갰다. 지수는 한참 동안 모니터를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배, 진짜 이상해요. 보통은 실명 인증된 아이디로 문자가 오는데, 이분은 아이디 자체가 익명으로 되어 있어요. [ID : 3번 창구]. 이게 다예요. 전화번호도, 성별도 안 떠요."


​[ID : 3번 창구].


은하는 입안에서 굴려보았다. 그것은 누군가를 부르는 호칭이라기보다, 누군가가 매일같이 머물고 있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지수에게서 소득 없이 물러난 은하는 결국 강 피디의 방으로 향했다. 강 피디는 편집실 소파에 길게 누워 쪽잠을 자고 있었다. 은하가 들어오는 소리에 그가 부스스 눈을 떴다.


​"은하냐? 이 시간에 안 가고 왜."


​"피디님, 부탁이 하나 있어요. 그 '틀렸습니다'라고 보낸 청취자요. 연락처 좀 확인해 주시면 안 될까요?"


​강 피디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앉으며 담배 대신 볼펜을 입에 물었다. 그는 은하가 왜 그를 찾으려 하는지 알면서도, 아니, 알기 때문에 더 단호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은하, 적당히 해. 지금 네가 어떤 상황인지 잊었어? 정 팀장, 조작 논란 때문에 일단 근신 처분받고 징계 위원회 대기 중이야. 본사 박 이사는 눈에 불을 켜고 네 꼬투리 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고...

매번, 똑같은 말을 반복해야겠니."


​"그러니까요, 피디님. 그 청취자가 제 증인이에요. 제 방송이 가짜가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 준 사람이라고요."


​"아니, 지금은 조용히 흘러가는 게 상책이야. 네가 청취자 개인정보를 사적으로 조회했다는 소문이라도 나봐. 정 팀장 잔당들이 가만히 있겠어? '아나운서 서은하, 직권남용' 이딴 기사 뜨는 거 순식간이야."


​강 피디는 완강했다. 은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 팀장이 휘두르던 칼날은 징계라는 이름으로 잠시 멈췄지만, 그 칼날이 만든 서늘한 공기는 여전히 은하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피디님, 저 그 사람한테 연애하자고 찾는 거 아니에요. 그냥... 그 사람이 왜 틀렸다고 했는지, 그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을 뿐이에요. 그게 제 마이크를 다시 잡게 해 준 힘이었으니까."


​강 피디는 은하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빤히 응시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더니 메인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한 방을 채웠다.


​"주소만이다. 번호는 절대 안 돼. 내가 번호까지 알려주면 그건 진짜 범죄야. 이거 조회한 거 기록에 남으면 나도 징계 각오해야 해. 경품 반송 확인용으로 접속한 걸로 올려둘 테니까,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마. 알았어?"


​은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강 피디는 서버에서 출력된 짧은 텍스트를 메모지에 휘갈겨 적었다. 그는 그 종이를 바로 건네지 않고 은하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은하야, 만약 네가 생각한 그 '멋진 팬'이 아니면 어떡할래? 환상은 환상으로 남을 때 아름다운 거야."


​"피디님, 전 환상을 찾는 게 아니라 '진짜'를 찾는 거예요. 할머니가 주신 그 식어버린 캔커피처럼요."


​강 피디는 한숨을 내쉬며 메모지를 은하에게 내밀었다. 은하는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를 받아 들었다. 메모지에는 단정하지 못한 글씨로 서울 변두리의 낡은 동네 주소가 적혀 있었다. 화려한 방송국 오피스텔과는 다른 느낌에 삶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는 장소였다.


​은하는 택시를 타고 메모지에 적힌 주소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가로등 불빛조차 희미한 어느 낡은 연립주택 앞이었다. 차에서 내린 은하는 주머니 속 메모지를 꽉 쥐었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낯선 골목의 정적은 그녀를 위축시켰다.


​은하는 102동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낡은 시멘트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302호. 칠이 벗겨진 철문 앞에 멈춰 선 은하의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하지만 초인종 위에 손을 올린 순간, 은하는 멈춰버렸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화려한 조명 아래서 수만 명에게 말을 걸던 아나운서 서은하가, 고작 '틀렸습니다'라는 네 글자에 이끌려 이름도 모르는 남자의 사생활을 침해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야심한 새벽에. 이 문을 두드리는 순간, 그것은 소통이 아니라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은하는 깨달았다. 자신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타인의 평온한 밤을 깨뜨리려 한 자신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아래층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당황했다. 이 야밤에 남의 집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누군가와 마주친다면 변명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반 층 위 어두운 계단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검은색 후드티를 눌러쓴 한 남자가 계단을 올라왔다. 남자는 302호 앞에 멈춰 서서 도어락을 눌렀다. '띠리릭' 소리가 적막한 복도를 울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과 닫히기 직전의 틈 사이로 은하의 귀에 익숙한 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 오늘 여러분께 들려드릴 이야기는 원고에 없습니다. 진짜 슬픔은 정답이 없더라고요...]


​그것은 분명 은하 자신의 목소리였다. 재훈이 집으로 들어가며 켜둔 오늘 방송의 다시 듣기 소리였다. 문을 닫기 전 봉지 사이로 노란색 캔커피 몇 개가 짤랑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저 뒷모습, 저 캔커피, 그리고 방금 들린 자신의 목소리.


​문이 닫혔다. 철컥,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지만 은하는 한동안 계단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는 그 남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3번 창구'이며, 매일 밤 자신의 오답을 정직하게 들어주던 그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은하는 도망치듯 연립주택을 빠져나왔다. 골목 끝 가로등 아래 멈춰 선 그녀는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강 피디가 적어준 주소였다.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00-5번지 ]


​그녀는 메모지를 천천히, 아주 잘게 찢어 길가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의 사생활을 훔쳐보려 했던 자신의 겁 없는 오만함을 버리듯, 메모지의 조각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은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직하게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웠다. 그녀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를 만나는 것은 서로가 가장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는 자리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은하는 자신의 창백해진 얼굴을 창에 비춰보았다. 그녀는 이제 안다. 3번 창구라는 그 이름 뒤에 숨은 진실이 무엇이든, 이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의 주소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파수에 걸맞은 진짜 아나운서가 되는 일임을.

​은하는 눈을 감았다. 좁은 계단 복도에서 들렸던 자신의 목소리가 밤의 공기를 타고 멀리 퍼져나가는 듯했다.


다음날,

방송국의 아침은 밤보다 차가웠다. 여느 때처럼 커피 머신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적인 소음과 누군가의 신경질적인 키보드 소리가 복도를 채웠다. 은하는 퀭한 눈을 감추기 위해 평소보다 짙은 메이크업을 하고 편집실 문을 열었다.

​강 피디는 어제와 같은 옷차림으로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은하가 들어오는 기척을 느끼자마자 하던 일을 멈추고 의자를 돌렸다. 그의 눈등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어제, 가봤냐?"


​강 피디의 목소리는 낮고 칼칼했다. 은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가봤어요."


​"미쳤구나, 그 밤에... 그래서, 만났어? 그 '3번 창구'라는 사람."


​은하는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문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왔어요. 내가 지금 뭘 하는 건가 싶더라고요. 피디님이 주신 메모지도 그 자리에서 다 찢어버렸고요."


​강 피디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어깨 근육이 그제야 눈에 띄게 이완되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놓인 종이컵을 들이켰다.


"잘했다. 진짜 잘했어. 은하야, 지금 윗선 분위기 장난 아니다. 정 팀장 징계 건으로 국장대행까지 불려 다니고 있어. 그쪽 라인 애들은 지금 네가 숨만 크게 쉬어도 '방송 품위 위반'으로 걸고넘어지려고 눈에 불을 켰단 말이야. 이제 제발 그 청취자니 뭐니 하는 환상은 버리고 방송에만 집중해. 알았어?"

​은하는 강 피디의 당부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어젯밤 재훈의 집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던 자신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스쳤다. 진짜 슬픔은 정답이 없다는 그 문장.


​"피디님, 저 한 가지만 더 알아봐야겠어요."


​"또 뭐. 설마 또 이상한거 물어보려는 건 아니지?"


​"아니요. 할머니 아들, 한진우 씨요. 7년 전 그 사고... 아무래도 석연치 않아요. 할머니는 아들이 조종사를 꿈꿨다고 했는데, 왜 그런 컨베이어 벨트 사고로 죽어야 했는지. 정말 단순 과실이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요."


​강 피디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는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로 '탁' 소리가 나게 집어던지며 일어섰다. 평소의 능글맞은 선배가 아닌,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듯한 야수 같은 눈빛이었다.


​"서은하, 너 미쳤어?"


순간 강피디의 목소리가 편집실 밖에서도 들릴만큼 켜졌다.


"그 사건, 검찰이랑 경찰에서 이미 '본인 부주의에 의한 사고'로 결론 내고 종결된 지가 7년이야. 그걸 이제 와서 왜 들춰? 네가 탐사 보도 기자야? 넌 아나운서야, 대본 읽는 아나운서라고!"


​"그래도 사연의 주인공이잖아요. 우리 방송에 나왔던..."


​"그만해! 나도 좀 살자, 제발~!"


​강 피디가 처음으로 은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편집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말을 이었다.


​"정 팀장 날리느라 내 목줄도 간당간당해. 여기서 네가 기업 비리니 산재 조작이니 이딴 거 건드리면, 그땐 나도 너 못 지켜줘. 아니, 안 지켜줘. 제발 적당히 좀 해라."

​은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강 피디의 공포는 정당했다. 방송국이라는 거대한 조직 안에서 진실은 때로 안녕을 해치는 바이러스 취급을 받는다. 강 피디는 화를 삭이려는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더니 책상 위에 놓인 팸플릿 하나를 은하 쪽으로 툭 던졌다.


​"이거나 신경 써. 다음 주 목요일, 우리 방송국 옆 구청에서 하는 '시민의 날' 행사. 네 이름으로 섭외 들어왔으니까 딴생각 말고 사회나 잘 봐. 윗선에 '저 이렇게 성실하게 외부 활동도 하고 반성하고 있습니다'라는 거 보여줘야 할 거 아냐."


​은하는 팸플릿을 집어 들었다.

[서울특별시 OO구 시민의 날 기념식]. 장소는 방송국에서 불과 두 블록 떨어진 구청 광장이었다.


​"알았어요. 갈게요."


​"그래. 가서 웃는 낯으로 사람들 비위나 좀 맞추고 와. 그게 네가 지금 해야 할 일이야."


​강 피디는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은하는 팸플릿을 가방에 넣으며 편집실을 나왔다. 복도를 걷는 은하의 구두 소리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은하는 알고 있었다. 강 피디가 외면하려 했던 그 '진실'이 사실은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것을. 그리고 어젯밤, 재훈의 집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예언처럼 느껴졌다. 당신의 손은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는 그 물음.


​은하는 구청 행사가 열리는 날짜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곳이 어제 그 남자가 일하는 곳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은하는 그저 자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