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 말이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
은하는 복도를 달렸다. 등 뒤에서 강 피디가 "은하야, 천천히 가!"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고, 화려한 조명 아래서 신었던 하이힐이 발뒤꿈치를 파고들었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 정 팀장이 던진 가짜 사연에 상처 입어 먼 길을 달려온 노인의 굽은 등만이 가득했다. 보안 요원들이 당황하며 제지하려 했으나, 강 피디가 미리 무전으로 "내 손님이다, 건드리지 마!"라고 으름장을 놓은 덕에 은하는 멈추지 않고 정문을 박차고 나갈 수 있었다.
로비 유리문 너머,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 한 노인이 주저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낡은 보따리를 품에 안은 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은 어제 라디오에서 들었던 '가짜 사연'보다 훨씬 더 작고, 훨씬 더 무거웠다. 정 팀장이 준비한 대본 속의 사연은 매끄러운 비극이었지만, 눈앞의 노인이 토해내는 통곡은 형체도 없이 으깨어진 삶 그 자체였다. 은하는 그 통곡 소리 앞에서 자신의 세련된 언어들이 얼마나 무력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은하는 할머니 앞에 멈춰 서서 거친 숨을 골랐다. 할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얼룩진 할머니의 깊은 주름 사이로, 은하의 세련된 아나운서 정장이 비쳤다. 할머니의 흐린 눈동자 속에는 미안함과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고, 은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나운서 서은하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마주해야 할 가장 정직한 거울이 그곳에 있었다.
"저기... 아가씨가 그... 라디오에 나오는 그분인가?"
할머니의 목소리는 갈라진 논바닥처럼 거칠었다. 은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 곁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무릎을 타고 올라오는 보도블록의 냉기는 은하의 이성을 차갑게 깨웠다. 이제 이곳은 스튜디오가 아니었다. 편집도, 재녹음도 불가능한 삶의 한복판이었다.
"어제 방송 듣고... 내가 꼬박 밤을 새웠어. 우리 막둥이가 생각나서... 나도 아가씨 말처럼 우리 애 꿈을 내가 다 죽여버렸거든. 내가 무식해서, 잘 살게 해주고 싶어서 그랬는데... 그게 애를 잡는 건 줄도 모르고."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품에 안은 보따리 매듭을 풀기 위해 바르르 떨렸다. 보따리 사이로 낡은 옷가지와 흙내음이 섞인 공기가 흘러나왔다. 할머니는 보따리 안에서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거기엔 이제는 색이 바랜,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비행기 그림이 있었다.
"우리 애가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다 그랬는데... 내가 기술이나 배우라고 때리고, 그림 그리는 족족 다 찢어버렸어. 어제 아가씨가 그러대. 사과하고 싶으면 말을 하라고. 근데 우리 애는 이제 이 세상에 없어. 내가 미안하다는 말을 할 데가 없어..."
할머니의 통곡이 텅 빈 로비에 울려 퍼졌다. 그 울음소리는 로비의 높은 대리석 천장에 부딪혀 다시 은하의 가슴으로 쏟아져 내렸다. 은하는 할머니의 떨리는 손을 보며 자신이 방송에서 내뱉었던 '용기'라는 단어가 얼마나 오만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고 싶어도 사과를 받을 대상이 세상에 없다는 그 절망을, 은하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다.
자신이 방송에서 내뱉었던 '용기 있는 말'들이 누군가에게는 이토록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가슴을 찔렀을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은 칼보다 예리하고, 때로는 뒤늦은 깨달음보다 잔인하다. 은하는 준비해 온 위로의 말들을 모두 삼켰다. 지금 필요한 건 아나운서의 유창한 멘트가 아니라, 할머니의 젖은 손을 잡아줄 온기였다.
은하는 떨리는 손으로 할머니의 거친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할머니를 끌어안았다. 비싼 실크 정장에 할머니의 눈물과 땀 냄새가 배어들었지만, 은하는 개의치 않았다. 할머니의 젖은 뺨이 은하의 어깨에 닿았을 때, 은하는 비로소 자신이 아나운서라는 가면을 벗고 한 인간으로 숨 쉬고 있음을 느꼈다. 할머니의 슬픔은 은하의 정장에 흉터처럼 남았고, 은하는 그 흉터를 기꺼이 껴안았다.
뒤늦게 달려온 강 피디와 지수도 그 광경을 보고 발걸음을 멈췄다. 강 피디는 카메라를 꺼내거나 마이크를 들이대는 대신, 보안 요원들에게 눈짓을 해 주변을 정리했다. 지금 이 순간은 방송용 콘텐츠가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건네는 진짜 주파수였기 때문이다. 강 피디는 로비의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막아섰다. 그는 피디로서의 본능보다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택했다.
한참을 울던 할머니가 은하의 품에서 겨우 진정하며 보따리 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것은 검은 봉지에 싸인, 식어버린 캔커피 두 개였다.
"새벽 기차 타기 전에 편의점에서 샀어. 아가씨가 방송에서 그랬잖아. 온도를 믿어보겠다고... 내가 줄 게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해."
기차를 타고 달려오는 동안 캔커피는 이미 얼음장처럼 식어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밤새도록 가슴팍에 품고 온 그 마음만큼은 은하의 손바닥에 닿는 순간,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따뜻하게 느껴졌다.
은하는 캔커피를 받아 들었다. 은하는 캔커피를 가슴에 품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아니에요, 할머니. 제가 받은 선물 중에 가장 비싼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은하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마음의 열기는 정 팀장이 던진 차가운 비수들을 녹여내기에 충분했다.
은하는 할머니를 모시고 방송국 안 휴게실로 향했다. 지수는 따뜻한 물을 챙겼고, 강 피디는 할머니가 안전하게 귀가하실 수 있도록 차편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휴게실의 소파에 앉은 할머니는 비로소 긴장이 풀린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은하는 할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 거친 손을 계속 잡고 있었다. 할머니가 털어놓는 이야기는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속죄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은하는 그 이야기를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가슴속 원고지에 새겨 넣었다.
그날 저녁, 은하는 방송 준비를 하며 거울 앞에 섰다. 옷에 묻은 눈물 자국은 말끔히 지워졌지만, 마음속에 새겨진 온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놓인 노란 캔커피 두 개를 바라봤다. 두 개의 캔커피는 은하에게 묻고 있었다. 네가 가진 주파수는 누구를 향해 흐르고 있느냐고.
은하는 다시 마이크 앞에 앉았다. 'ON AIR' 불빛이 들어왔다.
"오늘 여러분께 들려드릴 이야기는 원고에 없습니다."
은하는 할머니가 준 캔커피의 뚜껑을 땄다. 칙, 하는 소리가 주파수를 타고 청취자들의 귓가에 닿았다. 그 소리는 방송 사고를 알리는 신호음이 아니라, 진실이 시작됨을 알리고 있었다. 부조정실의 강 피디는 아무 말 없이 음향 페이더를 천천히 올렸다.
은하는 할머니의 갈라진 목소리를 대신하듯, 떨리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 저를 찾아온 한 통의 '진짜' 사연이 있었습니다. 새벽 기차를 타고 멀리서 올라오신 한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아들의 비행기 그림을 찢어버렸던 그 손으로, 오늘 제게 캔커피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분은 사과할 대상이 세상에 없다고 울먹이셨지만, 저는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는 이 온기가, 주파수를 타고 하늘 어디선가 비행하고 있을 그 아드님에게 반드시 닿을 것이라고요."
"진짜 슬픔은 정답이 없더라고요. 하지만 우리는 그 슬픔을 같이 나눠 쥘 수 있는 '손'이 있습니다. 오늘 밤, 여러분의 손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은하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도심의 밤거리로 흘러나갔다. 편의점 냉장고 앞을 서성이던 누군가에게, 텅 빈 사무실에서 야근하던 누군가에게, 그리고 고독한 방 안에서 헤드셋을 쓴 누군가에게 그 목소리는 따뜻한 손길이 되어 닿았다.
집 옥상에서 라디오를 듣던 재훈은 손을 내려다봤다. 30도만 숙이기로 했던 그의 고개가, 이제는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조금 더 정중하게 기울어졌다. 재훈은 은하의 목소리에서 자신이 보낸 '틀렸습니다'라는 문장이 어떤 꽃을 피웠는지 목격했다. 그것은 비난이 아니라 변화였고, 조롱이 아니라 연대였다.
은하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매끄럽지 않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사람 냄새가 났다. 말이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 그것은 화려한 웅변이 아니라, 상대의 눈물에 자신의 소매를 기꺼이 내어주는 고요한 동행이었다. 은하가 방송을 마치고 헤드셋을 벗었을 때, 스튜디오 안에는 정적 대신 묵직한 공명만이 가득했다. 마이크는 권력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과 자신의 진심이 만나는 아주 좁고도 깊은 통로라는 것을 그녀는 이제 안다. 은하는 휴지로 닦아낼 수 없는 마음의 습기를 느끼며,
'오늘은 DJ님 말이 틀렸습니다.'
라고 문자를 보냇던 청취자의 눈을 직접 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