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 말이 사람을 데려오는 방식
서은하의 휴대폰은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는 ‘서은하 캔커피’, ‘오답 라디오’가 상위권을 점령했고, 게시판에는 방송의 감동을 기록한 시청 소감이 초당 수십 건씩 올라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를 피하던 동료들은 이제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방송국이라는 곳은 승리의 기쁨만큼 시기심도 빨리 퍼지는 곳이었다. 은하는 분장실 거울 너머로 자신을 훑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시선들을 느꼈다. 7년 동안 쌓아온 ‘바른 아나운서’의 가면을 벗어던진 대가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화려하고 무거운 왕관이 되어 그녀의 머리를 짓눌렀다.
“은하 선배! 이것 보세요!”
막내 작가 지수가 태블릿 PC를 들고 뛰어왔다. 지수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속보: 감동의 살인 고백 사연, 알고 보니 조작? ‘서은하의 밤의 주파수’ 대국민 사기극 논란]
한 인터넷 매체에서 올린 자극적인 기사였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어제 방송된 사연자가 사실은 돈을 받고 연기한 배우였으며, 이 모든 것이 청취율을 올리기 위한 제작진의 자작극이라는 의혹이었다.
“결국 터뜨렸네.”
은하는 낮게 읊조렸다. 정 팀장은 은하가 숫자로 자신을 제압하자, 아예 그 숫자 자체를 ‘가짜’로 만들어 은하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히기로 한 것이었다. 진실을 말하자고 선언한 아나운서가 조작된 사연으로 대중을 울렸다는 오명을 쓴다면, 은하는 다시는 마이크 앞에 설 수 없게 된다.
그때, 은하의 어깨 위로 묵직한 손 하나가 얹어졌다. 강 피디였다. 평소라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를 질렀을 그가, 오늘은 차분했다.
강 피디는 아무 말 없이 충혈된 눈으로 담배 냄새가 밴 점퍼 안쪽에서 낡은 USB 하나를 꺼내 은하의 손바닥에 꾹 눌러주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면도를 하지 못한 듯 턱밑엔 거친 수염이 돋아 있었다. 설명은 필요 없었다. 그 USB가 그가 밤새 사투를 벌이며 얻어낸 유일한 방패라는 것을 은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은하야, 게시판 보지 마. 휴대폰도 꺼두고.”
“피디님, 이거 정 팀장님이...”
“알아. 어제 그 배우, 방송 끝나고 양심 가책 느껴서 나한테 먼저 연락 왔더라. 자기도 자식이 있는 사람인데, 은하 네 멘트 듣고 차마 정 팀장 시키는 대로 끝까지 못 하겠더래.”
은하는 놀란 눈으로 강 피디를 쳐다봤다. 강 피디는 밤새 그 배우를 직접 만나 설득하고, 정 팀장의 지시 사항이 담긴 녹취와 입금 내역을 확보해 온 참이었다. 강 피디는 초췌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날카롭게 빛났다.
강 피디는 대답 대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피디직을 담보로 국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던 새벽의 일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다만 은하의 어깨를 툭툭 치며 그녀를 국장실 쪽으로 이끌 뿐이었다.
"가자. 네 마이크는 내가 지킨다."
그 투박한 말 한마디가 은하의 가슴 한구석을 찡하게 울렸다.
오후 2시, 국장실 앞 복도는 폭풍 전야처럼 고요했다. 정 팀장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국장실로 들어갔다. 그 뒤를 은하와 강 피디가 따랐다. 정 팀장이 먼저 선수를 쳤다.
“서은하 씨의 독단적인 진행 때문에 우리 방송국 명예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조작 사연이라니요! 협찬사들도 계약 해지하겠다고 난리입니다.”
“서은하 씨, 해명해 보세요. 정말 이 사연, 당신이 짠 연극입니까?”
국장대행의 차가운 질문이 떨어졌다. 은하는 대답 대신 강 피디를 쳐다봤다. 강 피디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테이블 중앙에 연결했다.
“연극 맞습니다. 다만, 연출자가 서은하 아나운서가 아닐 뿐이죠.”
화면에 재생된 것은 정 팀장이 사연자에게 입금을 확인하며 “서은하가 당황하게 최대한 자극적으로 말해”라고 지시하는 녹취 음성이었다. 정 팀장은 예상치 못한 반격에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이건 함정이야!"라고 소리쳤지만, 뒤이어 화면에 뜬 사연자 배우의 자필 사과문 앞에서는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었다.
국장대행은 녹취록이 흐르는 내내 차가운 눈으로 정 팀장을 응시했다. 그는 정의가 구현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보다,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퍼진 기사를 수습하기 위해 누구를 희생시켜야 할지 철저히 계산하고 있었다.
"정 팀장, 자네가 사고 친 거였군. 수습 불가능한 수준까지 번졌으니 방송국 차원의 꼬리 자르기는 불가피해."
국장대행의 목소리는 정 팀장의 음모보다 더 시리고 냉혹했다.
은하는 비틀거리는 정 팀장을 보며 차갑고 나직하게 말했다.
“팀장님, 숫자는 거짓말을 안 한다고 하셨죠? 그런데 그 숫자를 만들기 위해 팀장님이 하신 짓은… 아주 추한 거짓말이네요.”
정 팀장은 마지막까지 독설을 뱉으며 퇴장했다.
"이게 끝인 줄 알아? 진실? 웃기지 마. 대중은 금방 잊어. 너희가 오늘 나 하나를 보낸다고 이 바닥 생리가 바뀔 것 같아?"
그는 비참하게 쫓겨나면서도 조직의 어두운 생리를 비웃으며 사라졌다.
국장대행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상황을 정리했다. 은하는 비로소 긴장이 풀려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회의실 문이 다시 열리고, 막내 지수가 사색이 되어 들어왔다.
지수는 숨을 헐떡이며 은하의 소매를 붙잡았다. 그 눈에는 단순한 당황함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실재(實在)와 마주한 자의 경외감 섞인 공포가 서려 있었다.
“선배, 피디님! 큰일 났어요! 방송국 정문에… 어제 그 사연자랑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 한 분이 찾아오셨어요. 새벽 기차를 타고 멀리서 올라오셨대요. 어제 방송을 듣고 밤새 울다가, 자기가 죽인 자식의 꿈을 이제라도 돌려주고 싶어서 아나운서님을 꼭 만나야겠다고… 정문 앞에 주저앉아 계세요!”
그 할머니는 은하가 마이크 너머로 뱉었던 그 '가짜 사연'을 대하던 은하의 진실한 목소리, 그 떨림 속에서 수년간 가슴에 묻어두었던 죽은 자식의 이름을 들었다고 했다. 은하의 가짜 위로가 세상 끝에 닿아 진짜 비극을 불러온 것이었다.
가짜가 사라진 자리에,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 ‘진짜’가 나타났다. 은하와 강 피디는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함정은 치웠지만, 이제 진짜 세상의 비명이 은하의 주파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