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위한 강원도 모터사이클 여행
강은 흐른다. 흐르는 강을 보는 사람들은 대개 묵묵하다. 강변에 서면 사람들은 깊어진다. 산은 서있다. 서있는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대체로 활기차다. 산에 오르면 사람들은 고조된다. 굳건히 선 것은 사람을 고양시키만, 흘러가는 것은 마음을 진정시킨다.
사람들이 강에 가는 건 조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묵시를 위해서다. 사람들은 강가에서 천천히 걷고 나직이 말한다. 가만히 앉아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바람이 불어오면 머리를 쓸어 넘긴다. 강을 보는 시선은 담담하고, 담담한 시선을 받아 강은 더 고요해진다.
6번 국도를 남동쪽으로 100 킬로미터쯤 달리면 섬강(蟾江)을 만난다. 섬강은 남한강의 제1 지류다. 강원도 태기산에서 발원해서 경기도 여주에서 남한강에 합수한다. 태기산 발원지에서 여주 합수부까지의 길이는 93 킬로미터다.
섬강은 1천 미터가 넘는 태기산, 치악산, 매화산 일원의 계곡들을 수원으로 삼고, 그렇게 받아들인 물로 강원도 남서부의 횡성과 원주 일대를 흘러간다. 태기산의 자락들을 굽이돌고 치악산의 계곡들을 따라 곡류하는 섬강은 수질이 맑고 유속이 느리다. 장마에도 범람하는 일이 드물고, 가뭄에도 마르는 일은 없다.
섬강에는 극적인 면모가 없다. 한강의 상징성, 낙동강의 최장성, 영산강의 풍요성, 금강의 서사성이 없다. 봄에는 강둑에 샛노랑 냉이꽃이 돋고, 여름에는 낮은 석양 속으로 둑방길이 멀어져 간다. 가을날 오후에는 참한 볕이 억새꽃에 스며고, 겨울에는 하얗게 언 강 위로 푸른 별들이 가득하다. 그것뿐이다. 섬강은 그냥 강이고 물이고 내일뿐이다. 섬강의 다른 이름은 뒷내, 북천(北川)이고, 섬강으로 합수하는 지천의 이름은 앞내, 전천(前川)이다. 앞내, 뒷내라는 이름은 섬강이 에고를 내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려준다. 섬강 가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순후하다고 말한다.
섬강의 뒷내다리 아래에는 백로가 산다. 다리 아래로 물이 천천히 흐른다. 물속 검은 바위들은 수면 위로 드문드문 머리를 내밀고 있다. 백로는 바위를 딛고 미동도 않는다. 백로의 새하얀 등 너머로 물이 반짝이고, 강둑 너머로는 푸른 산등성이들이 멀어져 간다. 백로는 그대로 섬강의 정물이다. 정적 속에 놓인 한 점의 존재다.
백로가 사냥을 한다. 사냥을 할 때 백로는 사냥감을 격하게 몰아붙이지 않는다. 맹렬하게 추적하지도 않는다. 가만히 서서 물고기나 개구리가 무심코 다가오기를 기다린다. 숨 죽인 채 소리 없는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 사냥감에 접근하기도 한다. 종종 완전히 멈춰서 상황을 살피거나 사냥감을 분석한다. 먹잇감이 가까워질수록 동작은 더욱 느리고 정교해진다. 눈은 집중된 시선을 유지한 채 면밀하게 물을 주시한다. 그러다가 일순 첨예한 부리를 결정적으로 찔러 넣는다. 섬세하고도 예리하다. 정적 속의 찰나, 고요 속의 촌철이 백로의 사냥법이다.
백로는 존재를 소거함으로써 자신이 존재함을 드러낸다. 백로가 가만히 서있고, 느리게 걷고, 잠자코 물을 응시하는 것은 게을러서가 아니다. 울거나, 뛰거나, 두리번거릴 줄을 몰라서도 아니다. 백로는 주의 깊게 자신의 소리와 몸짓을 통제하고, 신중하게 행동과 동작을 단속한다. 의도적으로 존재를 지움으로써 더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 존재를 드러냄에 있어서는 분별을 갖추는 것이 백로의 본질이다. 성찰과 분별을 갖춘 백로의 존재감은 묵직하다. 백로는 자신을 지워 배경과 하나가 되고, 백로를 품은 풍경은 점잖고 격조 있다. 그저 물이고 내일뿐인 섬강이 넉넉한 자족의 모습으로 아름다운 것은 그 강에 백로의 존재가 실리기 때문이다.
강둑을 따라 미루나무가 서있다. 미루나무 그늘진 강둑 아래 섬강이 흘러간다. 미루나무 이파리들이 반짝인다. 수면에는 어른거리는 빛이 가득하다. 바람이 미루나무를 훑어간다. 미루나무는 바람을 따라 누웠다 일어난다. 강물에는 미루나무 이파리 같은 잔물결이 인다. 무엇 하나 급할 게 없다.
미루나무에게는 독존의 분위기가 있다. 미루나무는 집 정원이나 울타리에 심지 않는다. 사람의 마을 가운데도 심지 않고, 여럿이 붐비는 시가지에도 심지 않는다. 나무가 울창한 산중에 미루나무를 심는 일도 없다. 미루나무가 자리하는 곳은 보통 고적한 벌판이다. 먼 곳에 이르는 도로의 한적한 길가도 미루나무의 자리다. 마을을 돌아 나가는 강변의 미루나무들은 익숙한 원경으로 자리 잡는다. 어디서든 미루나무가 질서 없이 밀식되어 빽빽한 군집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다. 미루나무는 간격을 두어 한 그루씩 줄지어 서고, 각자의 자리에서 곧고 높게 자란다. 적당한 거리감과 직립의 자세는 미루나무의 성정이고, 그런 성정으로 인해 여러 그루가 모여 있어도 미루나무에게서는 홀로 선 자의 애상과 자존이 느껴진다.
미루나무에는 늘 바람이 분다. 바람을 받고 있지 않는 미루나무는 미루나무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바람이 불어오면, 미루나무는 바람을 받아 낸다. 바람의 결 대로 눕지만, 바람을 붙들지 않고 부여잡지 않고 부둥켜안지도 않는다. 미루나무를 만나면, 바람은 미루나무를 통과한다. 미루나무를 흔들어 일렁이게 하지만, 머물지 않고 들러붙지 않고 옥죄지 않는다. 미루나무는 바람을 증명하고 바람은 미루나무를 설레게 하지만, 미루나무에게도 바람에게도 집착이란 없다. 바람 부는 강가의 미루나무에게서는 바람 속으로 길을 나서는 자의 애달픈 선선함이 묻어난다.
기도를 할 줄 모르지만, 기도를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정처가 없더라도, 길을 나서고 싶어 질 때가 있다. 기도를 하고 길을 나서는 건 모두 낮고 조용한 행동이다. 괴로울 때, 불안할 때, 쓸쓸할 때, 초라할 때, 낮고 조용히 기도하며 길을 구하고 싶어진다.
기도하고 길을 구하는 건 낮고 조용히 나를 대면하는 일이다. 나의 고통과 불안을 직시하고, 쓸쓸함과 초라함을 듣는 일이다. 내 속에서 들끓고 수런거리는 것들을 보아주고 들어주는 것, 그렇게 자신과 함께 있어주는 낮고 조용한 자기 동반이 기도고 구도다.
강가를 서성이는 일은 세속의 기도고 세상의 구도다. 섬강의 백로, 미루나무, 바람이 그걸 알려주었다. 섬강을 서성일 때, 백로는 고요했고 미루나무는 평화로웠고 바람은 편안했다. 모든 게 잦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