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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Jul 01. 2022

내 영혼의 기계, 모터사이클

넋이 나간 채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은 좋지 않다. 얼이 빠진 채 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데드라인이 내일인 보고서를 마치는 게 불가능해 보일 때, 아파트 잔금일이 일주일 앞인데 힘들게 준비한 돈 마련 계획이 어그러질 때, 들어가고 싶었던 회사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을 때, 넋이 나간다.


안될 것 같던 보고서를 허덕 지덕 마쳐 제출하고 나면, 여기저기서 그러모아 겨우 잔금을 치르고 나면, 불합격 통보를 받고 나서 더 이상 기다릴 합격 통보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면, 얼이 빠지고 진이 빠진다.


살다 보면 겪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고, 겪고 나면 혼이 다 달아난다. 그렇다고 그런 채로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은 좋지 않다.


혼이 나간 채 모터사이클을 타는 게 좋지 않은 이유가 꼭 위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게 하는 라이딩에는 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탈 때, 그 모터사이클은 내가 타는 모터사이클이 아니다. 종일 이메일을 쓰고, 전화를 하고, 회의를 하고 퇴근했는데, 돌아보면 막상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렇게 한 일들에 나는 없다. 그렇게 일하는 날들이 지나가고, 그런 날들이 빈 삶이 되는 걸 보면 쓸쓸하고 슬프다. 모터사이클을 타고도 빛나는 순간들과 환한 장면들이 내 안에 쌓이지 않으면, 그것도 쓸쓸하고 슬픈 일이다.


내가 없어져 쓸쓸하고 슬플 때는 라이딩을 잠시 미루는 것이 좋다. 생활의 소란이 마음에 가득할 때, 슬픔과 낙담과 분노가 들끓을 때, 넋이 나가고 얼이 빠졌을 때, 그럴 때는 라이딩에 나서기 전에 우선 잠시 진정을 하는 것이 좋다. 곤두섰던 것들이 잦아들고, 소란스러웠던 것들은 차분해지고, 사나왔던 것들은 순해지도록 한 뒤에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이 좋다. 그래야 라이딩에서 만나게 되는 것들을 튕겨 내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받아들이고 삭여서 나를 복구할 수 있게 된다.


진정을 하는 데는 차분한 라이딩 준비가 도움이 된다. 화가 났는지, 낙담하고 암담한 지, 초조하고 불안한지 내 상태를 알고 준비 절차에 들어가면 더 좋다. 경로를 꼼꼼히 검토하고, 지나가거나 방문할 지역의 날씨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게 복장과 장비를 하나씩 하나씩 챙긴다. 하나라도 없으면 라이딩이 불가능한 헬멧, 글러브, 키는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한다. 모터사이클에 도착해서는 타이어 공기압, 엔진오일, 브레이크 오일을 점검한다. 모터사이클에 오르면 시동을 걸고 계기판 경고등, 라이딩 모드, 연료량, 백미러 각도를 체크한다. 엔진 온도가 오르면 출발 준비가 끝난다. 이때쯤이면 이미 많이 차분해진다. 출발 전 점검 루틴은 마음의 진정을 위한 리추얼이기도 하다.


내가 준비가 되면 라이딩을 한다. 정성껏 한다. 건성으로, 습관대로 하는 라이딩은 정성껏 하는 라이딩이 아니다. 정성을 들인 라이딩은 주의를 집중하는 라이딩이다. 모터사이클, 모터사이클이 달릴 길,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터사이클을 타고 길을 달리는 나 자신의 감각과 인식에 주의를 집중하는 라이딩이 정성을 들이는 라이딩이다.


라이딩이 시작되면 먼저 몸의 감각에 집중한다. 온몸과 귀로 엔진 회전수, 속도, 토크를 감지하면서 변속 타이밍을 잡는다. 클러치 레버를 당기고 놓을 때 클러치 판들이 떨어지고 붙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느낀다. 기어 시프트 페달은 단호하게 차올리고 가차 없이 밟아 내리면서 기어의 체결감을 확인한다. 그러는 동안에도 눈으로는 전방의 노면과 주변의 풍경을 주시하고 느낀다. 얼굴과 몸 전체로 기온, 대기의 밀도, 바람, 노면의 질감을 느낀다. 길가의 금계국, 마을의 밤나무, 짙푸른 산들과 그 사이의 강과 호수를 본다. 땅 냄새, 풀 냄새, 꽃 향기를 맡는다.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와 자동차와 모터사이클의 소리도 듣는다.


모터사이클을 탈 때 몸의 감각은 아주 예민해지고, 예민해진 감각들은 내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있음을 의심할 수 없게 만든다. 예민한 감각은 외부로 열린 감각이고, 열린 감각을 타고 길에서 보고 듣고 맡고 느낀 모든 것들이 안으로 흘러 들어와 쌓인다. 그러면 나는 충만한 느낌으로 기쁘다.


라이딩을 할 때 감정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라이딩 시작 시점에는 감정이 조금 긴장되고 들뜬다. 시내 구간을 벗어나 양수리, 양평 같은 교외에 들어서면 기분이 느긋해지면서 흥겹고 즐거운 감정의 물결을 느낀다. 풍수원이나 둔내 같은 강원도 산간 마을을 지날 때는 호젓하고 쓸쓸하고 성긴 감정이 든다. 미시령, 한계령, 대관령, 백봉령 고개에 서면 태백산맥 아래 광대한 공간과 동해 바다가 가슴 가득 차 온다. 강릉이나 속초의 바닷가에선 기쁘고 행복한 느낌이 속에서 자글거리고 반짝인다. 석양에 홍천강 모곡에서 주홍색 해를 안고 달리거나 늦은 밤 덕소에서 어두운 한강과 불 켜진 서울을 볼 때면 저릿한 슬픔과 고독이 가슴께부터 퍼져 나간다.


모터사이클을 타는 동안에는 기쁘다가도 슬퍼지고, 밝다가도 어두워지고, 희망 속에서 낙담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잦다. 계기도 사연도 없이 감정들이 저절로 찾아들고 떠나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 감각이 집중되어 있어서 원래 내 안에 쟁여져 있던 감정들을 이제야 느끼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감정들마다의 본질과 내용을 분간할 수도 있게 된다. 분간된 감정들을 보고 있으면 조금 가볍고 투명해진다고 느낀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는 나 자신이 좋게 느껴진다.


라이딩을 할 때 생각의 명멸도 본다. 라이딩을 하면서 라이딩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다. 끝낼 수 없을 것 같은 프로젝트, 할 때마다 생채기를 냈던 미팅, 떨칠 수도 풀 수도 없는 관계, 이해할 수 없는 선택과 행동을 반복하는 좌절스러운 인연에 대한 무거운 생각들이 라이딩에 질기게 들러붙을 때가 있다. 주식, 부동산, 운동, 동호회, 술 약속, 월요일 업무 같은 소소한 생각들도 떠나지 않는다. 연상에 연상들이 이어지고, 생각이 생각들을 지어내는 일이 멈추지 않는다.


모터사이클을 탄다고 이 생각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들의 흐름을 볼 수는 있다. 모터사이클의 움직임에 집중하면, 모터사이클이 읽어 들이는 노면의 질감을 느끼면, 길가의 키 큰 미루나무와 그걸 쓸어 가는 바람을 보면, 익숙한 길을 넉넉하게 달리고 처음 가보는 길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나면, 끈덕지게 달라붙어 헛바퀴를 돌던 생각들이 속도를 늦추며 얼마간 물러난다. 그러면 나는 여유를 가지고 물러나 앉은 생각들을 볼 수 있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저 생각들의 주인이라는 걸 깨닫는다. 조금 느슨하고 편안해진다.


진정을 하고 정성을 다해 타면 모터사이클이 닫혔던 감각들을 열고 잊혀졌던 감각들을 일깨워준다. 감각이 깨어나면 라이딩을 하는 동안 몸과 감정과 생각의 순간들에 집중할 수 있고, 집중된 순간에 만난 모든 것들이 안으로 흘러들어와 쌓인다. 시야가 넓어지고 인식이 깊어진다.


모터사이클을 타면서 깨닫게 되었다. 모터사이클이 힘을 잃고 길가로 밀려나는 건 내가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이 위협적이 되는 건 내가 화가 났기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이 방향을 잃고 갈지자를 하는 건 내가 초조하기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이 경박하고 신경질적인 건 내가 교만하기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이 트러블을 일으키는 건 내가 모터사이클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터사이클 모양이 조잡하고 우스운 건 내가 겉멋 들렸기 때문이다.


이제 안다. 모터사이클은 시끄럽지만 그 위에서 나는 고요할 수 있다. 모터사이클은 위험하지만 위험할수록 몸을 낮추어 하나가 되면 안전할 수 있다. 모터사이클은 빨리 달리지만 그 위에서 내 생각은 천천히 흐를 수 있다. 모터사이클은 터프하지만 그 위에서 나는 유연할 수 있다. 모터사이클은 불안정하지만 그 위에서 나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모터사이클은 불완전하지만 나는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용기, 아량, 여유, 겸손, 신뢰, 진심을 작용시켜 모터사이클을 탈 때 고요하고, 안전하고, 차분하고, 유연하고, 안정적일 수 있다. 더 좋은 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모터사이클이 내 영혼의 기계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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