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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Jul 08. 2022

내 영혼의 장소, 강원도

강원도는 여행하기에 좋다. 깊은 여행이라면 더 좋다.


깊게 하는 여행의 느낌과 기억은 오래간다. 그 느낌과 기억의 깊이도 깊다. 여행의 느낌과 기억이 머리가 아니라 몸에 새겨진다. 깊은 느낌과 기억을 몸에 지닌 동안에는 일과 삶의 어려움 앞에서도 조금은 여유가 생긴다. 조바심이 아닌 여유로 어려움을 대하면 팽팽한 생활 속에서 때때로 숨 쉴 만한 틈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깊은 여행은 목적지의 크고 신기한 것들에 인상을 받는 여행이 아니다. 깊게 하는 여행에서는 도중의 모든 길과 장소를 맨몸으로 만난다. 여정의 순간순간들을 온몸으로 느낀다. 길, 장소, 순간에 임재하고, 그럼으로써 여행의 느낌과 기억을 섬세하고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준다. 체험과 경험으로 자아가 윤택해지고, 그 윤택함으로 나를 너그럽게 대할 수 있도록 변화시킨다.


모터사이클 여행은 본질적으로 깊은 여행이다. 라이더는 자신을 열어 무방비로 길, 장소와 하나가 된다. 라이더와 주위 사이에는 개입하는 장치가 없다. 라이더를 둘러싸는 인공적 대기와 공간도 없다. 무엇보다도 프레임으로 작용하는 윈도우가 없다. 라이더는 총체적 감각으로 주위와 교감하며 날것으로 모터사이클을 탄다.


라이더는 달리는 모든 순간들에 집중한다. 모터사이클에는 위험이 따른다. 정신을 차려야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집중해야 하지만 움켜쥔, 뻣뻣한 집중을 해서는 안된다. 뻣뻣하게 굳은 집중은 감각이 외부로 열리는 것을 차단하고, 몸이 유연하게 반응하는 것을 막는다. 라이더는 열려있고, 느슨하고, 그러면서도 기민하고 선명한 집중을 유지한다.


모터사이클을 탈 때 라이더는 시간과 환경의 밀도 속에 고스란히 놓이고, 그 여행의 밀도를 온몸으로 감각하고 인식한다. 모터사이클 여행은 깊고 농밀하다.


강원도는 여행하기 좋은 장소지만 모터사이클로 깊게 여행을 하기에는 더 좋은 장소다. 강원도에는 모터사이클로 달리기 좋은 길과 장소들이 많다. 그 길과 장소들에는 체증이 없다. 느낌, 감정, 인식의 자유로운 흐름이 방해받지 않는다. 온 신경이 짜증에 집중되다가 초점 없는 분노로 폭발하는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시야를 가로막는 답답한 구조물들도 없다. 강원도의 길과 장소들은 자연을 향해 열려 있다. 막힘없고 닫힘 없는 길, 장소, 자연 속을 달리면 막막함 위로 방도가, 슬픔 위로 기쁨이, 불안 위로 평온이, 분노 위로 고요가, 걱정 위로 용기가 돋아나는 것이 보인다. 그렇게 새로 돋아나는 것들이 보이면 마음이 환하고 부드러워진다.


강원도 길과 장소들은 물성이 다채롭다.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 구룡령, 진고개, 대관령, 닭목령, 삽당령, 백복령으로 태백산맥을 넘으면 동해가 나온다. 이 고개들 아래 바닷가에는 고성, 양양, 주문진, 강릉, 동해, 삼척이 있다. 내린천, 동강, 서강, 주천강, 홍천강, 의암호, 춘천호, 파로호 같이 강과 호수를 달리는 길들도 있다. 그 옆에는 인제, 정선, 영월, 횡성, 홍천, 춘천, 화천, 양구가 있다. 해산령과 천미계곡, 돌산령과 펀치볼, 벌문재와 오두재, 배후령과 물안마을, 달둔 월둔 살둔의 높은 산과 큰 고개를 이어 달리는 외진 길들도 있다.


길들은 관능적인 웨이브로 굽이치다가도 헤어핀 모양으로 급하게 꺾인다. 고개들은 산자락을 따라 유순하게 올라가다가 산허리를 지나면서 겹겹의 S 커브를 그리며 아찔한 낭떠러지 급경사를 이룬다. 강원도에서 모터사이클을 달릴 때 길과 고개들이 가진 리듬과 호흡이, 이완과 긴장이, 매혹과 두려움이 모터사이클을 타고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풍경의 아름다움과 쓸쓸함, 아늑함과 애닯음도 함께 쌓인다.


모터사이클은 욕망으로 타는 기계다. 욕망에는 두려움도 함께 한다. 모터사이클은 위험하다. 위험은 사실이고 현실이다. 라이더도 모터사이클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위험과 두려움을 안은 채 라이더는 모터사이클을 탄다. 욕망 때문이다. 모터사이클을 탄다는 것은 욕망이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다. 앞으로 나가려는 욕망이 잡아 세우는 이성을 넘어설 때 모터사이클을 탄다.


라이더의 욕망은 이중적이다. 라이더는 도드라지고 싶은 외적 욕망에 이끌린다. 경쟁적 스피드, 소유의 허세, 남다름의 과시, 의도된 일탈 같은 일차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은 피할 수도 없고 다스리기도 힘들다. 라이더의 마음 속 깊고 먼 곳에는 표 나지 않게, 조용한 내적 욕망도 자리한다. 아름다움, 이완, 휴식, 탈출, 평정, 고요, 용기, 인내, 탐험, 확장 같은 철든 욕망들도 피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관심을 기울여 보아 주고 돌봐주지 않으면 채워지기 힘든 욕망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강원도의 길과 장소들은 외적 욕망과 내적 욕망을 모두 허락하지만, 내적 욕망을 따라 달리기에 더 적합하다. 넓고 곧은 길보다 좁고 굽이치는 길들이 많다. 길이 산과 산 사이를 달리고, 강을 따라 흐른다. 마을들은 산, 강, 호수에 의지해 있다. 앞을 보며 쏘기보다 주변을 관찰하며 나 자신과 함께 달리기에 좋다.


라이더의 마음은 길과 장소에 연결되어 있다. 태백산맥을 넘어 바다로 향하는 길을 달릴 때 마음에는 아름다운 낭만과 동경과 희구가 찾아온다. 강과 호수를 따라 느긋하게 달릴 때는 평화와 안식이 찾아온다. 큰 산과 높은 고개를 잇는 길을 달릴 때는 고독과 고요와 성찰이 찾아온다. 강원도에서 라이더가 아름다움, 낭만, 동경, 희구를 찾는 것은 그 뒤에 팍팍함, 고단함, 남루함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와 안식을 찾는 것은 뒤에 불안과 초조를 둔 때문이다. 고독과 고요와 성찰을 찾는 것은 부대낌과 소음과 산만함 때문이다.


모터사이클로 강원도를 여행하는 것은 깊게 여행하는 것이다. 강원도의 길, 장소, 시간의 순간들에 임장하며 깊고 오래가는 느낌과 기억을 몸에 새기는 것이다. 추한 것들 위에 아름다움을, 뾰족한 것들 위에 부드러움을, 시끄러운 것들 위에 고요를, 위태로운 것들 위에 안정을, 얇은 것들 위에 두툼함을 쌓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강원도는 내 영혼의 장소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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