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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야 Mar 12. 2022

우울증엔 드라마가 특효약

우울함의 긴 터널을 함께해 주는 인생 드라마들

'올 것이 왔구나'


침대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는 그런 주말이 있다. 전날 딱히 잠을 못 잔 것도 아니고, 감기 몸살에 걸린 것도 아닌데,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그런 날. 해결되지 않는 고민거리들, 일상에 스민 무기력함, 인생 무상의 정서가 범벅이 되어 무겁게 몸을 짓누르는 것이다.


'올 것이 왔구나.' 물 먹은 솜 같은 우울감을 이불 삼아 편안히 눕는다. 섣불리 저항하거나 발버둥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오늘은 길게 좀 누워 지내 볼까'하며 마음을 편히 가져 본다. 지금쯤 열심히 도심 서점이나 갤러리에서 인사이트를 길어 올리고 있을, 자기 계발을 위한 공부나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지 않아야 한다.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어디에선가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을 피드를 오늘은 잠시 꺼두기로 한다.


손가락 하나를 겨우 움직여서 넷플릭스 혹은 왓챠 앱 버튼을 누른다. 그동안 몰아서 정주행해야지 했던 드라마 목록을 슥슥 넘겨 본다. '이거다' 하는 촉이 올 때까지 짧게는 10분, 길게는 20~30분 동안 열심히 들여다본다.


드라마 덕후의 소중한 두 친구


못 보는 게 많아도 너무 많은 드라마 덕후


스릴러, 호러, 추리, 고어물 등 무섭거나 잔인한 장르를 잘 보지 못하는 내게는 선택 범위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20대 초반에 아주 잠깐 영화평론가란 직업군을 선망하던 때가 있었는데, '볼 수 없는 영화들이 너무 많아서 꿈도 못 꿔보겠구나' 했다(못 보는 게 많아도 너무 많다...). 남들이 보기엔 취향이 뚜렷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나마 볼 수 있는 드라마와 로맨스물 중에 취향을 좀 얹다 보면, 뚜렷해질 수밖엔.


주말 동안 잠시라도 힐링을 줄 수 있는 '일드'와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한드' 중 그날의 컨디션에 맞게 선택한다. 평일 중 긴장감이 극도로 올라왔던 주간에는 '일드'를, 혈액순환(?)과 활기가 필요할 땐 '한드'를 주로 선택한다. 중드나 대만드라마를 즐겨보는 지인들도 있는데, 대만드라마 특유의 장황한 내레이션이 내 취향엔 영 맞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볼 수 없는 것들을 하나하나 지워 나가다 보면 볼 수 있는 한 줌의 목록이 나온다. 그리고 그 중 믿을 만한 안목 있는 친구의 추천작, 전작에 매료되었던 감독이나 작가의 작품, 몇 년 전쯤 화제가 되었던 작품들 중심으로 고민을 해본다(이상하게도 화제작은 방영 당시에 잘 끌리지 않는다). 왓챠에서 드라마를 볼 경우, 사람들의 평도 함께 볼 수 있어서 선택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간의 내 시청이력을 통해 내 취향에 맞을지도 나름의 예상치를 보여 주기 때문에, 이런 데이터도 많이 참고해 보는 편이다.


이렇게 지인과 알고리즘의 추천, 그날의 기분, 그리고 온 우주의 기운(?)이 모이는 교차 지점에서 나를 위로해 줄 특효약 드라마가 결정된다. 옳다구나, 너다.



몰입에도 시간이 필요해


한 달에 책 한 권 읽을까 말까 한 바쁜 와중에도, 한 달에 드라마 시리즈 하나는 뚝딱 끝내고야 만다. 예전에는 큰맘 먹지 않아도 밤새워 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아무리 토요일이라 해도 쉬엄쉬엄 가야 한다. 무겁게 감겨 오는 눈을 억지로 뜨며 보다가는, 중요한 장면과 대사를 놓쳐 버리거나, 그 의미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채 꿈뻑꿈뻑 화면만 보게 될 수 있다.


드라마에 푹 빠지기 전까지인, 1~2화(때에 따라서 1~4화)는 아무래도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구간이다. 주인공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지, 핵심이 되는 사건은 무엇인지 등등 새로운 정보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야 하는 구간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캐릭터와 스토리에 매력을 느끼기 전까지는, '이거 잘 선택한 거 맞겠지? 계속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내면의 갈등 아닌 갈등과도 계속 싸워야 한다. 하지만 이 구간을 잘 지나고 나면 해가 언제 지고 뜨는 줄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가 버리는 마법이 펼쳐질지니. 감칠맛 나는 요리를 위해 팬을 서서히 예열시키는 마음으로 집중을 해서 볼 필요가 있다.



조금만 더 가볼까?

그러고 보면 드라마의 초반부는 새롭게 시작하는 일과 어딘가 닮아 있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이 이 일에 관계되어 있는지, 익숙한 장르의 일인지 새로운 장르의 일인지, 실마리를 풀기 위해 꼭 알아두어야 하는 항목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주 잘 탐색해 두어야 한다. 긴가민가 하고 자신없어지기도 하는 그 구간을 딱 넘기고 나야, 비로소 흠뻑 '몰입'할 수 있게 된다.


초반에 속도감 있던 드라마 중 회가 거듭될수록 실망스러웠던 경험이 있는가 하면, 초반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중반부를 넘어서부터 '이건 인생드라마'라는 예감이 진하게 오기도 한다. 발빠르게 종료 버튼을 누르고 손절하는 것이 현명할 때도 있지만, 대개는 '참고 보길 잘했다'는 때가 더 많았다. 드라마는 감독과 작가, 배우가 만들어 내는 세계이기도 하지만, 시청자도 애정을 다해 함께 호흡을 맞추어야 하는 세계이기도 하다. 한 뼘 정도 되는 작은 화면 속을 헤매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고 수동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지만, 아니다, 나는 열과 성을 다해 그 세계를 짓는 데 동참하고 있었던 거다. 


다 포기하고 드러눕고 싶은 날 드라마를 자꾸만 찾게 되는 건, 어쩌면 세계로 한 발 깊숙이 내딛는 힘을 얻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마다 내면에서 무언가 꿈틀꿈틀대는 걸 느끼곤 한다. 제 아무리 비현실적인 캔디 드라마였대도, 그와 함께 울고 웃으며 그 에너지를 전달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드라마는 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본다.



내게 맞는 드라마 처방전을 정리하기


앞으로 더 건강한 드라마 시청 생활을 하기 위해, 나를 울고 웃겼던, 그리고 나를 살렸던 드라마들을 조금씩 글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때마다 다시 꺼내 보았던 옛 드라마의 추억들도 한 번 소환해 보려 한다. 


- 콩트가 시작된다

- 어제 뭐 먹었어?

- 오티스의 비밀상담소

- 동백꽃 필 무렵

- 로스쿨

- 청춘시대

- 마인

- 디어 마이 프렌즈

- 좋좋소


++ 터치 한 번이면 드라마를 꺼내 볼 수 있는 편리한 시대에 태어나 얼마나 다행인지. 


2021년 발견한 인생드라마 <콩트가 시작된다>. 극 중 배우들이 연기하는 '콩트 무대'와 콩트 바깥의 삶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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