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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해여자 Apr 22. 2024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닌데

일기

청바지에 블랙 쟈켓을 입으면서 구찌 플로라를

블랙 아이라인과 마스카라를, 레드 립스틱을

그리고 그를 찾아왔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닌데


민망하고 부끄러운 글이 많은데 그래도

이거 내 거라고 엮고 싶어서

좀 다듬어서 내놓고 싶어서

부끄러울 준비가 되어서

더 솔직히는 빼앗기기 싫어서

작업을 해야 한다면 그의 옆에서 하고 싶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저 남자에게 내밀만한 것들만 가려내보자 싶어서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닌데 그를 찾아왔다.


팔각의 저 지방시 찻잔이 말이죠,

올드해 보이지만 바디가 얄팍해서 입술에 닿을 때 느낌이 좋고요

무엇보다 손잡이가 환상적인데

손잡이의 안쪽 검지가 닿는 부분과 엄지를 슬쩍 올려놓는 부분이

너무나 내 취향이에요.

게다가 커브 안쪽이 누구 귓불 같아서 자꾸만 만지게 된단 말이죠.


설명 없이 커피잔을 바꾸어달라 했다.


그러면 안 되는데

바 안쪽에서 등 돌리고 서서 컵을 씻기 위해 그가 고무장갑에 손을 끼우는 순간

그러면 안 되는데

다 씻은 컵을 건조하기 위해서 마른 수건으로 반복해서 컵을 돌려 가며 닦는 순간

테이블에 무언가가 묻었는지 반복해서 테이블 위를 일정한 속도로 닦는 순간

입술을 깨물게 되고 손가락을 깨물게 되고

그러면 안 되는데 미안해져서 고개를 숙여버렸다

(사장님, 미안해요.)


우리 둘만 있고 싶은데 저기 저쪽의 손님들이 나가지 앉네요.

난 좀 있다 가야 하는데.


글을 추려보려는데 어떤 글에서는 피식 웃음이 나고 어떤 글에서는 눈물이 나고 어떤 글에서는 멈춰서 이건 누구 만나고 쓴 글이더라 생각하게 되고 민망한 글이 이렇게 많았나 이래도 되나 싶은데 더 늦기 전에 마무리하려고요. 그래서 사장님 앞에 내밀래. 잘 아는 사람 조금 아는 사람한테는 말 못 할 것 같고, 잘 알지 못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장님한테는 내밀 수 있을 것 같아.


에티오피아 드립. 커피 맛이 좋아요.

향도 노골적이지 않고

가벼워 보이는데 한 모금해 보면 진해서 시간을 두고 음미하면서 마실 수밖에 없어요.

자기랑 오래 있고 싶어서 천천히 마시는 건 아니라고요.

물을 한 잔 주면 좋겠는데, 커피만 마시다가 취하겠어.

전율하게 되는 강렬한 키스 같은.

아, 그래서 여기를 찾게 되나?

(사장님, 미안해요.)


나를 한 번 읽어볼래요?

몇 년 전엔가

나를 읽어달라는 말이 나를 한 번 벗겨보라는 말 같아서 차마 할 수 없다는 식의 표현을 한 것을 보고 웃었는데,

말도 안 되는 이런 글은 그만 쓰고

누가 봐도 글처럼 보이는 글을 쓰고 싶어서


지역 문인의 연락처를 찾아서 배우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고

회신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이건, 꼭 그래야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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