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샘미술관. 찬란함에 물들다. 한국근현대미술전.
by Om asatoma Oct 12. 2024
최근 도립미술관에서 봤던 작품을 잊지 못하고
근대화가들의 작품을 어디서 볼 수 있나 검색하다가
금샘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라기에
그래, 다음에 서울에 가면 가봐야지 하며 지도를 찾아보는데
부산이라 하지 않나!
그러면 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며
내일 중요한, 정말 중요한 일정이 둘 있음에도.
전시관이 전반적으로..
구립미술관 느낌이 매우 강하게 났지만
그래도 혹은 그래서, 전시 기획 유치를 위해 애씀이 느껴져 정겨웠던.
내면도 중요하지만 어떤 옷을 입는가도 중요하구나 새삼 느껴졌던.
10.20. 이 전시마감이어서 급히 다녀온.
유강열 작품 1972
나를 읽어줄 수 있겠습니까
지문으로 더듬어
결결이 스민 바람 닦아줄 수 있겠습니까
기다림이 쌓이고 그 위로 새로운 기다림이 쌓이는 동안
어쩌다 들어간 불순의 바람과 불순의 잎과
어둠의 정령을 걷어내어 주시겠습니까
더듬어야 합니다
지문으로 더듬어야 합니다
눈으로 보아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 여기, 여기...
마주 볼 수 있게 닦아주시겠습니까
김환기 월광 1959
이와 같이 따뜻할 수 있는가
한 시간 전에 읽다가 온 책이
푸른색 표지의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였다.
파리 유학시절 동아일보에서 온 전화를 받던 장면을 읽다가 왔는데
전시장 내벽을 돌아서니
월광이,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푸른 월광이 저와 같이 따뜻할 수 있는가.
'절대'로 존재하고 있는 모자람 없는 달과
달을 향해 기운 저 산이
모서리의 형태이면서도 저와 같이 다정하게 말 걸 수 있는가
서로의 形을 완전히 지켜주는 것,
직선과 곡선의 묵직한 조화
누구도 흔들지 못하나 저들 사이에는 율동과 리듬이 흐르는
저와 같이 충만한 관계가 존재할 수 있는가
깊은 어둠의 가장자리를 감싸는 저 빛,
닿는 곳마다 사랑이 찬란한 빛으로 치환되는 저 눈빛
존재와 존재로 영원 속에 있는 저 사랑의 끝을
굳이 알고 싶지는 않다
이보다 감미로운 밤이 있을 수 있는가.
캔버스에 음악을 그려놓은 화가,
월광 소나타.
저 푸른 월광 이불을 덮고 잠들고 싶은 잠들지 않을 이 밤
송영수 순교자 1967
그의 글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그는 어찌하여 순교의 삶이라 명하게 되었는지
묻지 않을 것이고, 알고 싶지도 않은 채
질문만 품고 있을 것이다
당신의 그 시집에서 하나의 단어만 남았는데 그것이 순교이며
그 두음절이 당신이라는 단어로 가슴에 박혀서는
저 작품 앞에서도 당신을 떠올리게 하시는가
김창렬 회귀 2011
한자와 물방울이 공존하는 화면
자신을 성장시킨 문화권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고 밝힘
한자가 아니라 한글을 택했다면
이 나라에 사라지지 않을 한글날마다 작품이 회자될 것이며
이 나라에서 가장 큰 기관에 작품이 걸리게 될 것이며
지금보다 천배 만배 그의 이름이 날릴 것인데
한글전용론이 우위인 시대를 살았음에도
가벼이 한글의 손을 잡지 않은 것에
어떤 문자보다 조형의 극치를 보이는 한자를 더욱 꼭 잡은 것에
경외를.
이왈종 생활 속의 중도 1997
폐관 전 찾았던 왈종미술관에 전시된 그의 작품이
너무나 화사한데
위로 없이 화사하기만 해서
이 세상에 없을
있더라도 나는 만나지 못할 종류의 따뜻함과 화사함이어서
미안하지만
저 작품 제목의 중도라는 단어가
놀기만 하지 말자는 말처럼 보여서
마음이 멀리멀리 달아나버렸다
백화점에 전시된
옷감도 좋고 디자인도 훌륭하고 색감도 빼어난
훌륭한 옷처럼,
내가 입을 일은 없어 보여서
그저 한 번 눈길을 줄 뿐 얼른 거두어 버리는.
이런 대가의 작품에 이런 심술궂은 감상평이라니.
이숙자 청맥靑麥 1978
푸름, 세밀함,
살아나고 싶은
살고 싶은
다시 살아보고 싶은
가능하다면 다시
이대원 농원 1980
강렬한 색채, 점묘법, 생명력, 생동, 경쾌
나에게도 꽃 피는 날이 올까
이 어둠이 걷히면
눈부신 세상 한 번은 볼 수 있을까
박서보 묘법 1967
몰입에서 오는 속도감
가속을 더하며 이루어지는 몰입
세차게 비 내리다 뚝 그치는 것처럼
우리 몰래 사랑하다가 뚝 그치자
송수남 호산서헌 1987
얼마 전 경남도립미술관 글을 쓸 때
다음에 언급하고 싶은 작품으로 미루어 두었던 작품의 작가를
기어이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
그러한 투명을 잊을 수가 없다
건너편에 있는 산과 하늘과 구름과 바다의 흔들림 없음이
특히 깊은 어둠의 靜과
이쪽의 찬란한 투명 속 動이
너무나 조화로운.
어서 건너편으로 가고 싶은.
변시지 까마귀 울 때 1980
제주 기당미술관 상설 전시 작품에서 느낄 수 있었던 휘몰아침은 없었음
높다란 소나무 곧게 서 있고 여자 주인공도 허리를 비교적 펴고 서있으며 풀도 눕지 않았다
어떤 다행. 바람을 예상했는데 그래서 크게 한숨 들이마시고 작품 앞에 섰는데 바람이 불지 않아 이 다행스러움. 안도ㅡ 잠깐의 휴식.
- 까마귀도 날아가지 않고 낮은 돌담에 앉아있음
-자연과 집의 경계에 있는 낮은 돌담, 그 위에 앉아있는 까마귀,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 심지어 구름 사이 언뜻 파란 하늘이 보이는 것도 같은
-고된 하루 보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 집의 안락을 생각할 때의 푸근함이 느껴지는
- 기당미술관에서는 무척 힘들었는데
내가 그 바람 다 맞고 서 있는 것처럼 힘들었는데 그 바람에 휘청였는데
안도.. 안도..
아무 일 없음이 느껴져서
오늘 하루 바람이 쉬어서
쉴 수 있는 시간을 허락받아 눈물이 쏟아짐
허락된 단 하루의 시간 잠시의 순간 같아서
그러나 그 시간이 짧다고 원망하지도 않는
그저 감사밖에 남지 않은.
지금의 내 상황과도 닮아 더 눈물이 나는
바람이 잠시 쉬는 시간
거센 파도가 잦아든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