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Om asatoma
Nov 07. 2024
無垢無碍
네 글자를 보았을 때,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 생각했다.
어떤 의미로 저 글자가 오고 갔을까 궁금했다.
우선, 사전상 등재되어 있는 사자성어는 아니었다.
출처를 찾고 싶었으나 나의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비슷한 유형의 구문을 떠올려 보았다.
No pain, no gain.
그리고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노콘노섹(No condom, no sex.)
동일 구문이라 생각한다면 無垢無碍 역시
'垢가 없으면, 碍도 없을 것이다.' 정도가 되지 않을까?
垢는 흙 토변을 썼다.
때, 티끌이다. 수치, 부끄러움, 더럽다, 나쁘다의 뜻이 있다고 한다.
碍는 돌 석변이다.
거리끼다, 장애가 되다, 지장을 주다, 방해하다의 뜻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티끌이 없을 때,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더럽고, 나쁜 것이 없을 때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거리낌이, 막힘이, 방해가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닌지.
즉,
당신에게 잘못이 없어야
막힘없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의 경고의 말은 아닌지.
하지만
모든 기사에서 저 구문을 풀이하기를
인생을 살면서 허물이 없어 걸릴 것이 없다는 뜻이라고 하니 그렇게 알 수밖에.
그러고 보니
'허물이 없으면, 걸릴 것이 없다 그러니 허물을 만들지 말라'는 뜻으로 선물을 하지는 않았을 거다.
堪忍待
이 문구도 궁금하다.
역시 모든 기사에서 견디고, 참고, 기다리라는 것으로 해석이 되어 있다.
堪과 忍과 待가 각각 독립적인 의미로 쓰인 것으로 풀이한 것이다.
만약 그러하다면
무엇을 견디고 무엇을 참으며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堪
아마도 자신의 업보로 인하여 주어지고 있을 모든 것들을 견디라는 뜻일 것이다.
흙 토자 변인데 인과 관계를 따져묻지 않고 덮어 놓고 견디라는 것이 아닐까.
현생에서의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전생의 업보일 수도 있으므로
원망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견디고 감당하라는 것.
忍
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길래 칼날 인에 마음 심을 썼을까.
마음에서 올라오는 분노와 억울함과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칼날로 베어 버리듯
참으라는 것이다. 참으라는 것은 겉으로 표현하지 말라는 것이다.
표정으로도 행동으로도 표현하지 않고 스스로 감당하라는 것이다.
사인이라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상쓸 수 있더라도
사람들의 눈이 향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어려울 것이다.
待
좌변의 조금걸을 척(彳)을 나는 길 위로 보겠다. 行을 사거리로 읽는 것과 같이 본다.
그렇다면 그 기다림은 더 어려워진다.
집에 앉아 아직 오지 않은 님을 편안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길 위에서 그 어떤 순간을, 그 어떤 이를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기다림의 외로움과 고독, 막연함에 대해서는 기다려 본 사람들만 알 것이다.
그런데,
堪과 忍과 待를 각각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堪의 목적어를 忍과 待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즉,
겉으로 보이지도 못하고 마음을 도려 낼듯 고통스러운 인내와
홀로 외롭게 서서 비바람 부는 짙은 어둠 속 낯선 길 위에서의 기다림을
감당하라.가 된다면
결국
그러한 상황을 자초한 것은 당신의 업보이며
그러한 업보의 결과물인 忍과 待를 당신이 스스로 감당하시오.가 될텐데
이 역시도 선물로 준 글귀라면 맞지 않는 해석일 것이다.
설마,
경고의 문구를 주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러한 글귀를 들고 웃으면서 사진을 찍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해석 말고,
전문가의 생각이 궁금하다.
+
고려대 중한사전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으므로
본인의 해석은 얼토당토없는 말장난일 수도 있는 것으로.
…도 없고[아니고] …도 없다[아니다]. [두 개의 뜻이 같거나 비슷한 글자의 앞뒤에 쓰여 없다는 뜻을 강조함]
无缘无故
wúyuánwúgù
이유도 까닭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