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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m asatoma Nov 11. 2024

우리동네 술 가게, 다정한 남자

뭔가,

의외성이 필요했다

흐름을 끊어줘야 했기에

강습을 신청해 놓고 이번달에 한 번도 가지 않은 수영장엘 갔다


영을 배운 적이 없으면서 흉내만 냈다

강사의 목소리가 아주 또렷했다

목청이 컸고 발음이 분명했으며

남자였고 통실했고 귀여웠고 웃는 인상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브런치에서 나파밸리의 와인을 이야기하는 글을 보았다

어쩌면 최악의 조합이 될 수 있었지만


초기감기증세에

밤수영을 갔으며

와인을 한 병 사와서

마신다, 마셨다


동네 술가게 문 닫는 시간 전에 가서

2만 원대, 달지 않은, 쥬시한 와인을 추천해 달라 했는데

사실은 빨리 취할 수 있는 와인을 부탁하고 싶었다

여성분들이 대부분 좋아하는 와인을 하나 권하시기에

아니라고, 나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와인 말고 남자들이 좋아하는 와인을 달라했다

떫은맛 괜찮으시냐고, 충분히 괜찮다고,


사실은 아무 기대가 없었다

2만 원대 와인..

마트 주류 진열대 앞에서 시간을 보내기 싫어서 술가게로 간 것이었을 뿐이다


의외로, 사장님이 꽤 괜찮은 사람 같았다


권해주시는 걸로, 훌렁 집어왔다

마침 캘리포니아 와인이었다


아이들 키우는 입장에선 와인을 와인잔에 마실 수 없다

대놓고 술 마시기엔 교육적이지 않아

깊은 머그잔에 한 잔.

마치 포도주스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차음가본 우리 동네 술가게 사장님은 굉장한 분이신지

엉터리 같던 오늘 하루가 아주 만족스럽게 정리되는 듯했다


기대이상으로 신선한 맛에

풍부한 과일향과 적당한 탄닌이 매우 조화로웠다

단맛은 싫다고 했지만

뭔가 헛헛한 오늘에 어울리는 의외의 부드러운 맛이 충분한 위로가 되었다


아, 여기서 의외성이 발현되었구나.

의외의 부드러운 맛.

이런 맛인 줄 알고는 택하지 않았을 텐데

아주 떫거나 아주 드라이하거나 단맛이 아주 없거나 극한의 맛으로 극한으로 나를 보내고 싶은 하루였는데


밸런스가 잘 맞는 부드러운, 쥬시한 와인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오늘 하루의 나를 안아주는 것 같았다


다정한 남자 같은 와인.

귀 기울여 이야기 들어주며 토닥여주는 다정한 애인 같은 와인.

CANNONBALL Cabernet Sauvignon California


깊고 고혹적이며 은근한 멋은 없다

캐주얼한 만남이지만 아주 매너가 좋은 남자 정도.


전혀 술 같지 않은

술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라이트하고 쥬시함이었지만

머그 한 잔 정도로 취기가 금세 올라왔다


짧은 시간 동안 알아차리지 못하는 새 무장해제시킬 정도면 꽤 매력적인 남자정도 될 것이다


운동을 해서 좀 나아진 것인지

각보다 괜찮은 와인이어서 나아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더 이상 손 쓸 방법 없이

이지 않는 곳에 오랫동안 눌어붙어 있던 주방의 때 같지는 않다

젖은 낙엽쯤으로 격상되었다


얼른 먹고

다음 술을 추천받고 싶다


빨리 취하는 걸로요.

혼자 마시기 좋은 걸로요.

뭐든요.


뭐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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