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유월의 불청객 8월 늦 장맛비

feat. 신의 가느다란 비수

by 운곡


운곡 김정익


8월.....


이미 저만치 물러갔어야 할 장마가 느지막이 문을 두드린다.



창밖의 빗줄기는 단순한 물방울이 아니다.


오래 벼려진 투명한 칼끝.


우주의 침묵을 품고 곧추 떨어진다.


인간의 자만과 허세를 스치며, 묵묵히 지나간다.



무겁고 습한 공기 속에서


우리는 매일 감정을 달구었다 식힌다.


짧은 인내는 쉽게 부서지고,


젖은 골목마다 고단한 한숨이 깃든다.



삶은 서서히 진흙빛으로 탁해져 간다.


그 속에서 우리는 발을 빼려 애쓴다.



이 늦 장맛비는 마음을 부풀렸다가,


이내 잿빛 고요 속으로 데려간다.


짜증과 허무의 경계에서 문득 깨닫는다.


붙잡아둘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빗줄기는 영혼을 적시고,


우리의 꿈은 오래 비에 젖은 편지처럼 번지고 흐려진다.



그러나 이 비는 단순한 계절의 변덕이 아니다.


138억 년 전, 빅뱅의 불꽃이 흩어지던 순간부터


모든 것은 이미 엔트로피라는 고요한 손길 속에 들어 있었다.



별이 피어오르고, 이내 사라지듯,


지구 위의 장맛비 또한


거대한 우주 악보 위에 찍힌 작은 먹물 자국 하나일 뿐.



가뭄은 땅을 갈라놓고,


홍수는 삶을 삼킨다.


그 앞에서 인간은 두 손을 모아 하늘을 우러르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장맛비는 침묵의 노래처럼 들린다.


신의 고요가 스며든 음울한 선율,


그리고 우리가 세운 벽을 조용히 적시며


덧없음을 속삭인다.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을 정복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빗줄기는


그 교만을 부드럽게, 그러나 확실히 지워낸다.



콘크리트 벽은 빗물을 막아낼 수 있어도,


우주의 냉혹한 리듬은 멈출 수 없다.



장맛비는 신이 남긴 시(詩) 이자


우리에게 겸손을 강요하는 무언의 가르침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비가 우리를 짓누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해방의 리듬도 숨어 있다.



우주의 무심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거짓된 서사 속에 매이지 않는다.



빗속을 걸을 때,


우리는 잠시 자유로워진다.


의미도, 무게도 내려놓고,


흔들리는 그림자처럼 묵묵히 걸어간다.



그 자유는 차갑고 서늘하지만,


우주의 진실에 귀 기울이는 자만이 들을 수 있는


고요한 음악이다.



결국 우리는 우주의 주인공이 아니다.


비에 젖어 길을 걷는, 스치는 나그네일 뿐.


빗소리는 신의 침묵일 수도,


혹은 심장이 멎은 메아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도 그것을 멈출 수 없다.



그저 그 아래 서서,


우리의 덧없음을 인정하는 일.


그것이 빗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계절의 불청객 늦장마는 곧 끝나겠지만,


우주의 법칙은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문다.



그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비수 앞에서


어쩌면 신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운곡 김정익


긴 세월의 내공을 껴안고, 삶의 무늬를 또 다른 언어로 그려 내려고 고민합니다. 가슴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지나온 날들의 바람 소리, 잊히지 않는 얼굴들, 그리고 아직도 풀리지 않은 질문들을 물결로 엮어 실개천에 조용히 흘려보내고 싶습니다.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한 줄한 줄의 문장들이 바람처럼 스치고, 별빛처럼 가슴 깊은 곳에 내려앉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