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言)의 온도

by 운곡

feat. 둘러대는 말과 신뢰를 주는 말

雲谷​


젊은 시절, 구두는 지금처럼 진열대에서 골라 신는 물건이 아니라 양복처럼 줄자로 발을 재고 맞추어야 했다.

구두점에 가면 언제나 화려한 조명과 진열된 멋진 구두 사이로 가죽 특유의 향이 새 구두를 기대하는 마음을 설레게 한다.


능숙한 솜씨로 발 사이즈를 재고 나면, 며칠 뒤 외피가 대강 만들어진 상태에서 한 번 더 발을 넣어본다. 이때 장인은 발등을 지그시 눌러보기도 하고 뒤축의 간격도 살피고 미세한 차이를 손으로 짚어낸다. 그렇게 일주일 남짓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한 켤레의 구두가 비로소 완성된다


문제는 완성된 구두를 신어보는 순간이다.

어딘가 조금 작은 듯한 느낌. 발끝이 닿는 것도 같고, 발등이 살짝 답답하여 좀 작은듯하다고 말하면 장인은 손사래를 치며 에이 손님 그게 아니고 “구두는 원래 조금 작은 듯해야 합니다. 신다 보면 늘어나요. 처음부터 딱 맞으면 나중엔 헐거워져서 더 불편해요.”라고 말한다.


이게 아닌데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좀 내키지는 않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그냥 받아 들고 나선다..

그런데 묘한 건, 다음번에 구두가 살짝 크게 나왔을 때다. 그때는 또 다른 말이 따라붙는다.

“구두는 약간 여유 있게 신어야 발 건강에도 좋고 오래 신습니다.”

어느 쪽이든 설명은 완벽했다. 작아도 이유가 있고, 커도 이유가 있다.

그런데 요행히 딱 맞으면 그때도 어김없이

“맞춤 구두는 원래 기성화와 다릅니다. 발에 착 달라붙게 만드는 게 기술입니다.”

이쯤 되면 웃음이 나오며 허탈감마저 밀려온다..


수제 구두는 밀리미터 단위로 작업해야 하는 매우 정교한 작업이라 손으로 하는 한계는 있을 것이기에, 장인의 말은 그때그때의 발 상태와 기분에 맞추어 일기예보처럼 변덕스러운 진실'일 수는 있겠다고 이해를 한다 쳐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말에 진심이 묻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상인의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위기만 벗어나고자 하는 느낌이라 씁쓰레하다.

결국 적당히 둘러대는 말은 늘 준비돼 있고, 상황에 따라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서 진정성을 찾기란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어린아이들의 말일지라도 더듬거리며 자기 의중을 정확히 담아낸 말은 이상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반면 달변가는 늘 유려하다.

하지만 그가 어제 한 말을 오늘 기억하지 못하고, 오늘의 말이 내일 바뀐다면, 그 사람의 색깔과 신념은 어디에 있는 걸까?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으로 빠져나가는 말은 그럴듯하지만, 남는 것은 없다.


사람의 말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 일관성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을 예측 가능하게 만든다.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의 말은 여지없이 불편하다 예측 가능하다는 건,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좋은 예로 럭비공은 불규칙하게 튀어 방향을 예측하기 어렵다.

반면 일반적인 공은 궤적과 착지를 통해 어느 정도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사람의 말도 그렇다. 럭비공처럼 튀는 말, 일관성 없이 바뀌는 말은 긴장을 낳고, 결국 불신을 준다.

상황에 맞게 순발력 있게 임기응변으로 빠져나가는 말은 언제나 그럴듯하지만 그 불편한 진실은 곧 드러나게 된다.

나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신뢰이며 진실성이라고 믿는다


대체로 상인의 말에는 사업적 목적이 앞서다 보니 진실성이 결여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특히 광고가 그렇다.

며칠 전 전기 자전거 하나를 구입했다. 정보가 부족해 나는 광고를 꼼꼼히 살펴보고 나름 신중하게 선택했다.

그런데 막상 타보니, 자신들만의 특징이라 주장하던 기능이 타사 제품에도 있거나, 오히려 더 나은 경우도 있었다.

가장 황당했던 건 주행거리였다.

한 번 충전으로 160km를 달릴 수 있어 일주일은 충전 없이 탈 수 있다고 했다.

타사 제품은 60~100km라 불편하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반쯤은 맞았다. 저가 제품은 그 정도였다. 하지만 비슷한 가격대의 타사 제품을 찾아보니 오히려 200km까지 주행 가능한 모델도 있었다. 사실을 전부 말하지 않는 것도, 엄밀히 말하면 거짓은 아니다. 그러나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이렇듯 지나친 광고와 홍보는 늘 주의해야 한다.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니, 살아오며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긴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방어적인 말들을 내뱉었을 터이다. 이제는 좀 더 진중한 말을 위해 한 번 더 생각하고 대화를 해야겠다 다짐한다.


이제 나는 처음부터 마음을 홀리는 듣기 좋은 말보다,

시간을 견디며 신뢰를 얻는 말이 더 편안하다는 것을 조금 알 것 같다.


조금 서툴고, 표현이 거칠어도 자기 삶의 무게가 실린 말. 처음엔 조금 작은 듯 불편해도, 신다 보면 발에 맞게 길들여지는 구두처럼 그런 말이 오래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