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대길(立春大吉)

by 운곡

雲谷의 "콩트"


feat. 아버지가 훔쳐온 봄


운 게 없어도 성실한 최 씨에게는, 일찍 세상을 뜬 아내가 남긴 초등학생 외아들이 있었다.


늘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평소와 달리 풀이 죽어 있었다. 공책을 펼치고 깊은 한숨을 연신 내쉰다.

내일 입춘이라 '입춘대길(立春大吉)' 한자를 써 오라는 선생님의 숙제가 머릿속을 맴돈다.

최 씨는 새벽마다 손수 지어낸 두부를 팔러 다니는 사람이었고, 아들은 아버지가 글자를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녁상을 차린 최 씨는 아들에게, 와 그라고 있노? 밥 다 식는다 얼릉 묵자.

아들은 한숨만 쉬었고, 최 씨가 몇 번 다그치자 마침내 숙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버지의 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어린 마음이 무거웠던 것이다.

최 씨는 '그깟 일에 사내대장부가 와 고민 하노? 걱정 마라, 아버지가 해결해 주꾸마!' 라며 큰소리를 치며 아들의 어깨를 툭 쳤다.

아들의 표정은 못 믿어 하면서도 금세 살짝 풀어진다.


제는 이제부터 최 씨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말은 자신 있게 했지만, 그날 밤 최 씨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태어나서 글 한자 몰라도 두부는 잘 팔렸고, 살아오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그런데 아이 앞에서는 그게 다 소용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입춘대길”그게 다 뭐꼬, 봄이 온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그걸 써 줄 수 없다는 게 그날따라 유난히 부끄러웠다.


벽, 김이 모락모락 피는 두부판을 어깨에 메고 길을 나선 발걸음은 무거웠고, 머리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그러다 최 씨는 새 단장한 가게 앞에서 주인이 문설주에 글이 씌어 있는 종이를 붙이는 걸 봤다. 옳거니, 저거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입춘 축이었다.

풀이 채 마르지 않은 듯 붓글씨가 선명했다.

주위를 둘러보고는 조심스레 떼어 품에 넣었다.

도둑질이라는 생각이 슬쩍 스쳤지만 아이 얼굴이 더 먼저 떠올랐다.

이게 뭐가 그리 대단하노? 글자 몇 개잖아, 아이 숙제 하나인데, 스스로 위로하며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돌아온 최 씨는 자랑스러운 미소로 가슴을 떡 하니 펴고 아들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다.


들이 숙제를 제출하자 선생님은 종이를 펼쳐 보았다

순간 선생님의 눈에 들어오는 건 新裝開業(신장개업) 네 글자였다.

선생님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종이와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이는 그저 초롱 한 눈빛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그 눈빛에는 부끄러움도, 장난기도 없었고, 그저 숙제를 해 왔다는 표정뿐이었다.

조용히 접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훔쳐 온 봄은 그렇게 아들의 교실로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