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정상 영업합니다

최 씨의 5,000원

by 운곡

단편소설
설날 정상 영업합니다.
雲谷
1997년 IMF 폭풍이 몰아치던 그해 겨울, 최 씨는 명예퇴직 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TV에서는 외환위기 뉴스가 끊임없이 흘렀고, 거실 소파에 앉아 퇴직금 계산기를 두드리다 지친 최 씨가 힘없이 아내를 바라보자 안타까운 모습으로 지켜보던 아내의 한마디 “우리… 국밥이라도 팔아보자.”
평소 요리 솜씨로 가족의 입맛을 책임지던 아내의 제안은, 그날 밤 최 씨에게 유일한 출구처럼 느껴졌다.

씨는 이듬해 1998년, 서울 변두리 골목시장 근처에 작은 고깃집을 열었다.
처음엔 손님이 없어 의자에 앉아 졸기 일쑤였다.
봄비 오는 저녁, 골목시장 번영회 회의가 끝나고 몰려온 단체 손님을 처음으로 받았다.
“고기가 연하고 맛있다며 연신 감탄하며 "한 접시 더" 추가 주문이 쏟아졌다.
그날 이후 입소문이 더해지면서 한가하던 가게의 졸음을 쫓아냈다.

내의 곱던 손마디는 생강 뿌리처럼 거칠어졌고, 집기마다 손때가 배어들었다.
세 명으로 시작한 식당은 금방 커져 주방 식구 5명, 홀 직원까지 10여 명 규모가 됐다.

2000년대 초 새 천년 파티로 고깃값이 치솟았을 때 경영난으로 고기 손질을 하던 직원 한 명을 내 보내고 아내가 직접 새벽에 재료를 다듬던 날도, 2020년 팬데믹에 매출이 반토막 나 버린 그 몇 해도 최 씨는 소상공인 운영자금 대출로 버티며 그 모든 위기를 파도타기처럼 잘 넘겼다

지만 올해는 달랐다.
식자재값 인상에 전기 요금 등 간접비 인상까지 겹쳐 매출은 겨우 버티는 수준까지 떨어지고 작년부터 시작된 불경기와 원화 가치 하락으로 압박은 더 선명했고 이제 명절날 쉬는 것조차 사치가 된 기분이다.
어려운 와중에도 언제나 설날만큼은 문 닫고 가족과 함께 지냈으며 직원들에게도 명절 휴가와 약간의 명절 떡값을 주었다.
즐겁게 웃던 기억들이 최 씨의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씨는 PC 앞에 앉아 “설날 연휴 정상 영업합니다.”라는 문구를 인쇄했다.
아내가 툭 던지듯 물었다. “이거… 꼭 붙여야 해?” 그는 대답 대신 유리문에 테이프로 붙였다.
혹시 테이프가 떨어질까 한 번 더 눌렀다.

절이 다가온다는 건 예전엔 설렘이었다면 이제는 마감일이었다.
밀린 임금, 식자재 외상값,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배달 주문이 아니라 돈 달라는 전화일까 봐 휴대폰을 진동으로 바꿔놓는다.

답함에 담배를 만지작거린다. 평소엔 아직 몇 개비가 남았어야 할 시간이지만 오늘은 벌써 빈 갑이다.
아내의 “담배 끊어라”는 성화가 점점 거세졌지만, 장사가 안 풀릴수록 담배는 늘었다.

배를 사기 위해 식당 옆 편의점엘 가니 오늘은 담배 보다 로또 복권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로또 복권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고개를 돌리며 속으로 중얼거린다.
에이 내 "짧은 복"에 저게 될 턱이 있나....
애써 외면하고,
최 씨는 젊어서부터 피우던 한라산 한 갑을 달라고 하려는데,
문득 양 담배에 눈이 간다.
최 씨가 젊은 시절에는 양담배가 불법 유통이 되었고 당시는 양 담배를 피우면 무슨 역적이나 매국노 같은 분위기였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최 씨는 60 평생 국산 담배만 애용하며 나름 작은 애국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식자재 외상장부와 밀린 임금뿐이었다.

래서 마음은 더욱 싱숭생숭했고 자신도 모르게 작은 일탈이 꿈틀거려 이름도 잘 모르는 양 담배에 눈이 간다, 평소에 친구처럼 지내는 편의점 강 사장에게 말했다. 한라산 말고 오늘은 양 담배 한번 줘봐
강 사장은 깜짝 놀라며 왜 무슨 일이야? 내가 편의점 시작하고 난 뒤 오직 한라산만 피우더니..
"뭘로 줄까?" "아무거나 줘" 강 사장은 자신이 즐겨 피우는 낙타 그림의 카멜 담배를 주었고
양담배를 받으면서 최 씨는 내친김에 아까 사려다 만 로또 복권까지 한 장 달라고 한다.

권을 손에 든 최 씨는 뚫어져라 쳐다보며 묻는다. 이거 언제 추첨하는 거야
오늘 금요일이니 내일 추첨이여, 설날 연휴가 시작되니 오늘 밤 좋은 꿈 꿔라고 말하는 강 사장을 뒤로한 채 서둘러 식당으로 온 최 씨는 식당 마감 준비하며 거울을 쳐다본다

씨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참 낯설게 느껴진다
주름이 깊어졌다기보다 접힌 자리마다 사연이 눌러앉은 얼굴이었다.
명절이 다가올수록 얼굴은 늙고 어두워졌지만 지난달 새로 한 간판은 더 환해졌다.

까 붙인 설날 영업 안내문이 유난히 또렷하다.
손님을 부르는 문구가 아니라 세상에 보내는 변명처럼 보였다.
최 씨는 중얼거렸다. 젠장 명절이 “이젠 쉬는 날이 아니라 버티는 날이구나.”

또 복권이 주머니 속에서 바스락거렸다.
당첨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일도 문을 열 이유가 하나쯤은 있어야 했으니까.
그날 밤,
최 씨는 식당 마감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채 쓰러져 잠이 들었다.

음날 식당에서 저녁 장사가 바쁠 시간이 시작되었지만 명절 연휴라 꽤 한가했다
무심결에 TV를 켜니 로또 추첨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별생각 없이 주머니에서 복권을 꺼냈다.
“에이, 되겠어…” 하면서도 TV에 시선을 고정한다

번째 번호가 불렸고, 복권을 내려다봤다.
있다.
두 번째 별 감흥 없이 쳐다보는데 역시 있다.
세 번째 번호까지 맞자 최 씨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고 최 씨의 허리가 곧게 펴졌다.
네 번째를 들을 즈음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고 네 번째 번호가 확인되는 순간 최 씨의 고막에서 웅~하는 이명이 들리는 듯했다.

섯 번째 번호를 확인하고서는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고, 고깃집 식당의 요란한 환풍기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여섯 번째 마지막 번호가 일치하자 최 씨의 심장은 멎을 것 같았고 순간 눈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리모컨을 쥔 최 씨의 손이 수전증 환자 보다 더 심하게 떨렸다.
호흡을 가다듬고 화면의 당첨 번호를 휴대폰으로 찍어서 숫자를 다시 세었다.
복권을 접었다 펴며 몇 번을 보고 또 보고 확인했다.

, 여보…”
목소리가 이상하게 갈라졌다.
아내가 주방에서 나왔다.
“왜 그래?”
직원들이 들을 새라 조용한 곳으로 가서 아내에게
“이거, 이거 좀 봐봐.”
아내는 말없이 최 씨의 휴대폰에 찍혀 있는 당첨번호와 복권을 번갈아 보며 맞춰보더니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이게 정말 다 맞는 거야?”
그 순간 최 씨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쁨보다 먼저 현실이 몰려왔다.
직원들 얼굴, 미뤄둔 월급, 식자재 외상값, 설날 영업 안내문.
“여보,” 아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이제 설날 쉬어도 되겠다.”
최 씨는 웃지도 울지도 못한 채 그만 다리에 힘이 풀어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음으로 내일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밤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직원 단톡방을 열었다.
‘내일 쉬어도 좋다는 내용으로 문자를 찍어 갔다..


띠링띠링, 띠링띠링 새벽 5시에 맞춰둔 알람 시계가 묵직하게 울리고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것은 희망의 끝이었고, 다시 시작되어야 할 현실의 신호탄이었다.
손안에 꽉 쥐고 있던 당첨 복권은 온데간데없고 눅눅한 이불자락만 움켜쥐고 있었다."

TV는 꺼져 있었고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휴대폰을 보니 설날 아침 다섯 시
언제나 그렇듯 먼저 일어난 아내가 말했다.
“뭐야, 식은땀을 다 흘렸어.” 최 씨는 멍하니 웃었다.
“번호가… 다 맞더라.”
“뭐가?” 아, 아무것도 아냐..
잠시 후
그는 점퍼를 입고 주머니를 더듬자 로또 복권이 그대로 있었다.
복권을 만지작거리며 집을 나섰다.
식당 셔터 앞에 서서 한 번 더 주머니를 확인했다.
복권은 그대로였다.
“젠장…” 그는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꿈에서는 당첨되더니.”

터를 올렸다. 철컥, 철컥
불을 켰다.
유리문에 붙은 설날 연휴 정상 영업합니다. 안내문이 채 가시지 않은 어둠 뒤로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안내문을 잠시 바라보다
최 씨는 주머니에서 로또 복권을 꺼냈다.
꿈은 꿈이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로또 사이트에서 당첨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호는 어긋나 있었다. 기대는 빠르게 식었다. 그래도 번호 세 개는 맞아 있었다. 당첨금 5,000원.
최 씨는 피식 웃었다. “그래 이게 딱 나답네.”
설날에도 문 여는 인생에 일확천금 대신 담배 한 갑 값.
그는 복권을 다시 접어 지갑에 넣었다. 버리기엔 아깝고 기대하기엔 너무 현실적인 숫자였다.

을 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지.”
5,000원. 기적은 아니었지만 기권하지 말라는 위로 정도는 되었다.
명절도, 인생도 그에게는 여전히 정상 영업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