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와 자존심

여덟 살 이예지 양

by 이승환

설거지를 하는데 계속 찬물이 나왔다. 엄마가 보일러를 꺼서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다며 보일러를 켜라고 했다. 켜 주는 것도 아니고 켜라니! 자존심을 스스로 지킬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사나이는 한겨울에도 물 온도 따위에 연연하지 않아."


엄마 표정이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면 네 오해다. 아마 감탄하는 마음을 들키기 싫어서 그랬을 테다.


"그러면 고무장갑이라도 껴."


심드렁한 말투도 아빠를 더 배려하는 마음이 들키기 싫어서 그런 거다.


"진정한 사나이는 손이 얼어도 고무장갑 따위는 끼지 않아."


한 번 더 꿋꿋하게 자존심을 지켜냈다. 그러든지 말든지 엄마는 심드렁하게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더구나. 자존심과 비례해 손이 얼얼할 무렵 어느새 바짝 다가온 네가 물었다.


"아빠, 그런데 아빠 자존심이 설거지야?"


아빠가 한참 크게 웃는 것은 대체로 할 말이 없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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