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 없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책이 팔리지 않고, 대학에서는 인문학 전공이 줄어들며, 사회의 중심에서도 밀려났다는 말이 반복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서점에는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단 책들이 넘쳐난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를 이해하는 법”, “고독을 받아들이는 자세” 같은 제목들. 말 그대로 ‘인문학적’ 주제들이 하나의 시장처럼 소비되고 있다.
그러나 문득 이런 질문이 들었다.
정말 인문학은 위기일까? 혹은, 인문학적 사고란 정말 따로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인문학이 삶의 다양한 영역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시대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인문학이라 부르지 않을 뿐이다. 과학자든, 디자이너든, 사업가든, “왜 이것을 해야 하지?”, “이 일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는 이미 인문학의 경계 안에 들어선 것이다.
철학자 이진경은 『노마디즘』에서 말한다.
“사유란 이미 정해진 틀 안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틀을 의심하고 벗어나려는 시도다.”
인문학은 정해진 학문이나 카테고리에 갇힌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경계를 이동하며 ‘왜?’라고 묻는 태도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은 철학, 과학, 예술, 기술, 노동의 구분을 넘나 든다. 우리가 ‘인문학적 사고’라 부르는 것은 결국 인간답게 사는 법을 묻는 사유의 궤적이다.
고병권 역시 『철학자와 하녀』에서 이렇게 쓴다.
“철학은 하녀처럼 삶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일이다. 번잡하고 지저분한 문제들을 질문으로 꺼내어 하나씩 닦아보는 일.”
인문학은 고상한 추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진창을 마주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밥벌이의 고단함 속에서, 인간관계의 균열 속에서,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이건 무엇인가?”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이미 철학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어떤 선택이 ‘비인문학적’이라 말하는 태도에도 반대한다. “돈을 벌겠다”, “안정적인 직업을 갖겠다”는 삶의 전략도 충분히 인문학적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의 이유와 태도다.
“나는 왜 돈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그 돈을 통해 나는 어떤 삶을 꿈꾸는가?”
이 질문들이 뒤따른다면, 그 길 위에서도 인문학은 숨 쉬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렇게 묻는다.
“인간이 악마보다 더 끔찍해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자는 누구나 ‘왜 인간은 이런가?’라고 묻게 된다.”
그에게 인문학은 고통과 악을 피해 가는 지식이 아니라, 그 한복판에서 던지는 존재의 물음이다. 이처럼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질문 자체가 인문학적 사고다. 그런 질문이야말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이런 장면을 남긴다.
“그는 자신이 제대로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삶 전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자기 성찰 없는 삶의 말로는 공허하고 쓰디쓰다. 인문학은 성공이냐 실패냐를 묻기 전에, 그 삶이 진실했는가, 주체적이었는가를 묻는다. 단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성찰하는 힘, 그것이 바로 인문학의 정신이다.
⸻
결국 인문학은 어떤 특정한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이며, 질문하는 방식이다.
‘인문학적 사고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배우는 모든 과정, 선택하는 모든 순간, 살아가는 모든 장면 속에 조용히 녹아 있다. 우리는 다만, 그 질문을 잊지 않아야 한다.
“왜?”라고 묻는 용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깊이.
그 자체가 바로 인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