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누군가 혹은 무엇을 바라보는 것.
바라봄은 동경의 대상일 수도 있고, 혐오일 수도 있다.
이도저도 아닌, 초점을 잃은 멍한 시선일 수도 있다.
배고플 때의 시선, 아름다움에 대한 시선, 자연의 경이로움 앞에서의 시선,
복수심에 불타오를 때, 사랑하는 이를 바라볼 때,
반려동물을 대할 때, 위험을 예감할 때…
이렇듯 하루 중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시선들이 교차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셀 수 없는 시선들을 주고받고, 무시하며,
때론 무감각하게 흘려보내며 살아간다.
장애 아동들의 통학길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나는
그 수많은 시선들 중 ‘오래된 시선’들을 자주 마주한다.
아이들과 함께 차를 타고 정류장에 멈출 때, 혹은 신호 대기 중에,
천천히 도심을 달리는 동안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낯선 시선들이
우리 버스를 향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학생들은 타인을 의식하지 않은 채
차창에 멍하니 앉아 있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혼자일 때는 그냥 쳐다보는 정도지만, 친구와 함께 있을 땐
마치 웃음거리가 생긴 듯 서로 수군대고, 손가락질하며 속삭인다.
차가 신호에 멈추면, 옆 차선의 운전자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짙게 선팅된 창 너머로 신기하다는 듯 아이들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길을 지나가는 어른들은 힐끗힐끗 차 안을 들여다보려 하고,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주기적으로 고개를 돌려
안 보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들여다본다.
그 ‘은밀한’ 노력이 다 보인다.
가끔 고약한 이들은 손을 흔든다.
아이들이 반응하면, 우리 안의 동물이 반응한 것처럼 웃는다.
그 웃음을 볼 때면, 물이라도 끼얹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한다.
그저 따가운 시선 한 바가지를 끼얹을 뿐이다.
가끔 아이가 제시간에 나오지 않아 차에서 내려 기다릴 때도 있다.
기다리며 익숙하고도 낯선 시선들을 마주하게 되면,
때로는 다가가 한마디 건넨다.
“재미있으세요?” 그러면 상대는 멋쩍은 듯 “미안합니다.”
라며 황급히 자리를 피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바쁜 시간에, 이렇게 큰 차를 정차해도 되나요?”
하며 쏘아붙이기도 한다. 그러면 차분하게 설명한다.
“특수학교 통학 차량이고, 아이들의 등하교를 위해 잠시 정차하는 것은
합법적인 일입니다.”
그러면 상대는 “그래도 그렇지…” 하며 자리를 피하곤 한다.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창밖을 응시한다.
자신만의 루틴에 따라 행동하다가,
어느 순간 창가에 기대 잠이 들기도 하고,
초점 없는 시선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기도 한다.
기댄 창문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소리를 내기도 하고,
때론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웃거나 손을 흔든다.
그러면 그 손짓에 따라 흔드는 이도 있다.
아이들의 반응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해석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지만,
이 일을 하면서 장애에 관한 여러 정보와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모든 장애는 불편함을 동반하지만, 특히 우리 차에 있는 발달장애 아이들은
누군가의 돌봄과 안전망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자폐스펙트럼으로 인해 언어, 인지, 사회성을
정상적으로 갖기 어려운 아이들이 많다.
그럼에도 이들을 지탱하는 몇 겹의 안전망이 있다.
가족이라는 1차 안전망, 학교라는 2차,
시설과 복지센터라는 3차 안전망이 아이들을 지켜준다.
이 안전망 없이 아이들은 생존조차 어려워진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고,
사회적 관계를 원활하게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삶을 살아낼 수 없는 사람들. 그들이 지금
이 땅의 발달장애인들이 처한 현실이다.
장애인들을 돕는 수많은 시설들은
분명 도움이 되지만 동시에 ‘분리’를 전제로 한다.
한 공간에 모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인은 우리 사회에 많이 존재하지만,
쉽게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분리는 시선을 낯설게 만든다.
내가 어릴 적 노란 머리의 외국인이나,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을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TV 속에 나와 한국말을 잘하는 몇몇 외국인을
신기하게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외국인을 어디서든 자주 보게 된다.
그렇기에 더 이상 신기하지 않다.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낯선 존재가 아닌 ‘익숙한’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선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장애를 이유로 사회로부터 분리되어야만 한다면,
아이들을 향해 쏟아지는 그 불편한 시선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 수업을 참관하러 간 적이 있다.
딸의 모둠 안에 피부가 까만 아이가 있었다.
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혹시 저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까?
집에 돌아와 조심스럽게 딸에게 물었다.
“그 모둠에 있는 피부 까만 친구, 애들이 놀리거나 그러진 않아?”
딸의 대답은 아주 단순했다.
“왜? 00 말하는 거야? 우리 서로 엄청 친한데?”
나는 그때 충격을 받았다.
내가 갖고 있던 생각—피부색이 다르면 당연히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전제—
그 자체가 이미 ‘분리’를 내면화한 시선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미 이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다름’을 보며 자라났고,
공교육 역시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교육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를 가진 이들이 더 자연스럽게 사회 속에 녹아들 수 있도록
다양한 토대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스스로 방어조차 할 수 없는 아이들이
신기하다는 이유로 받는 시선들—그 시선들에 담긴 혐오, 배제, 차별, 구별—
이제는 사라졌으면 한다.
더 따뜻한 시선도, 더 특별한 시선도 필요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나 역시,
내 시선이 편견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지
다시금 스스로를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