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의 마트료시카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조라 닐 허스턴

by 시지프
"그 무엇도 꿈꾸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법이란다. 아무리 사람을 밟아 뭉개더라도 그 사람의 의지를 완전히 빼앗아 버릴 수는 없지." -책 속에서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 남북전쟁의 소용돌이 속 희생되는 개인과 살아남기 위한 의지를 십분 펼치는 인간의 의지를 다룬다. 불멸의 사랑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 작품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배우들이 선보인 멋진 연기와 화려한 스케일로 아직까지 회자된다.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가 지속되던 1930년대 만들어진, 자그마치 100년이 되어 가는 작품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세련되고 흥미로운 전개에, 222분이라는 무지막지한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원작인 소설도 훌륭하다. 1,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3일 만에 밤을 지새우며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주인공들의 매력이었다. 주인공들 사이의 다툼과 사랑, 이들이 보여주는 끈질긴 생명력은 책을 덮지 못하게 만들었다. 문학적 예술성이 조금 결여된 듯한 문체는 종종 이 책을 역사서처럼 느끼게 했지만,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는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대단한 캐릭터들이었다. 영화까지 보고 나서는 한동안 이 캐릭터들에게 푹 빠져 지냈다.


그러나 이 모든 매력을 차치하고, 이 작품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인종적 편향성'이 바로 그것이다. 원작에도, 동명의 영화에도 흑인 캐릭터는 철저히 백인중심주의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그려진다. 미국 남부 상류층 백인인 주인공 가족에게 순응하는 흑인은 '착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북부의 승리 후 권리를 되찾은 흑인과 집안일을 하기 싫어하는 어린 흑인 하녀는 위협적이고 징징대기만 하는 '나쁜' 인간상으로 묘사된다. 자유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노예 위치를 자처하는 흑인들을 받아주는 주인공은 너그러운 주인으로 표현되어, 작품 전체에 시혜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심지어 주인공의 가족 중 한 명은 KKK에 가담하는데, 그 과정에서 소설은 이들을 부당한 처사에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를 지키려는 자경단처럼 그린다. 영화판에서는 사회적 파장을 고려한 듯 민감한 사안을 수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흑인 하녀 캐릭터를 시종일관 높은 목소리로 '땍땍거리는' 듯이 묘사해 비판을 피해갈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영화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최근 세계를 뒤흔든 'Black Lives Matter' 캠페인이 진행되며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퇴출되어야 한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이미 이전에도 이 영화는 미국의 유명한 급진적 흑인 해방운동가인 '말콤 X'의 어린 시절에 우울함을 안겨준 바 있으니, 만듦새를 제외하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작품인 셈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최초 흑인 여우조연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여전히 차별받던 흑인 배우들을 사려 깊게 대해준 미국의 전설적인 배우 클라크 게이블(레트 버틀러 역)의 일화는 이 작품의 양면성을 더욱 강화하는 듯하다.


이렇게 극심한 차별을 그대로 답습하는 작품이 존재하는 반면, 차별의 메커니즘을 면밀히 포착하여 세밀하게 그려내는 작품도 있다. 이 글의 주제인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가 그러하다. 작품의 배경은 남북전쟁 후 시간이 조금 흐른 때를 다루고 있으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비교적 유사한 시간대라고 볼 수 있다.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지만 '차별'을 대하는 시선은 대척점에 선 이 소설은 숨 쉬듯 이루어지는 차별의 서늘함과, 이를 깨달아 가는 주인공을 그린다.


차별을 당하는 집단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같은 정도의 차별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일례로 이전에 리뷰를 작성했던 소설 <아메리카나>에서처럼, '흑인'이 모두 다 차별에 민감한 것은 아니다. 부의 수준에 따라, 갖가지 여건에 따라 이들은 서로 다른 차별을 경험하고, 따라서 민감도도 다르다. 누군가는 미국 태생이기에 뼈에 새겨진 정도의 인종차별을 경험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다 자란 후 이민했기에 인종차별보다는 다른 차별에 더욱 민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재니'는 자유인 흑인 여성이다. '자유'의 바람은 얼마나 달콤한지,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를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진 차별은 또 다른 이빨을 드러낸다. 해방 시기를 살았던 재니의 할머니는 자유인이 되었음에도 '보호막'이라는 이름으로 재니에게 결혼을 종용한다. 가부장제 사회풍조 속에 자란 재니에게도 이러한 처사는 당연하게 여겨진다. 흑인으로서 비교적 자유로워졌지만, 또 누군가에게 종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결혼한 재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남편의 '그저 작은 손찌검'이었다. 아름다운 동아줄인 줄 알았더니, 썩은 동아줄이었던 셈이다. 남편의 소유물처럼 살지 않기 위해 택한 다른 사랑은 시간이 지나자 다시금 폭력으로 돌아온다. 두 번째 남편이 죽은 후에야 재니는 능동적으로 삶을 일구어나가기를 꿈꾼다. 헤르만 헤세 식으로 표현하면 그는 점점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작가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점점 강해지는 자의식을 마주하는 재니를 통해 차별의 기제를 명료한 언어로 드러낸다. 차별은 무수히 많은 얼굴을 갖고 있다. 깨뜨린 줄 알았던 인종차별은 시치미를 떼며 성차별로 나타나고, 동성애 차별로 나타나고, 수많은 다양성을 해친다. 우리나라로 치면 죽지도 않고 또 온 '각설이' 같다. 형형색색 다채로워야 할 세상은 차별이라는 리바이어던에게 막혀 자꾸만 색을 잃는다. 이 거대한 바다 괴물을 무찌르는 데는 우리 모두의 협력이 필요하고, 진정한 협력을 위해서는 이해를 거듭하는 투쟁이 필요하다. 흑백 텔레비전이 컬러 텔레비전으로 진화했을 때, 무성영화가 유성영화로 진보했을 때 벌어진 혁명처럼, 두 발 딛고 선 이 세상도 고색창연한 아름다운 땅이 되길, 오늘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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