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을, 믿는 것을 믿습니다

고양이 요람/커트 보니것

by 시지프
그리고 나는 자신했다. 강직하고, 공정하고, 인자한 통치자가 되리라. 내 국민은 번영을 누리리라.
파타 모르가나.
신기루!
-본문 중에서


전쟁을 다룬 블랙코미디 작품을 읽거나 보다 보면 머리가 어질어질해진다. 이런 작품들은 전쟁을 그저 질타하거나 전후 피해자의 상흔을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냉소적으로 상황을 비틀어 버리곤 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작품 속 여러 에피소드를 마주하다 보면 전쟁은 집단의 의사결정이 초래하는 가장 강력한 파국이 맞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길 바랐는데, 요즘 정세를 보면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가 맞나 보다.


어릴 때 실뜨기를 하며 논 적은 없지만, 떠오르는 유사한 경험이 있다. 인터넷을 하다 보면 그런 이미지들을 마주할 때가 있지 않은가? 처음 볼 때와 유심히 볼 때가 다른 그림들 말이다. 이를테면 처음 보았을 때는 동물 말을 그린 그림인 줄 알았는데, 실은 나무가 듬성듬성 그려진 풍경화라거나. 때로는 원래 무엇을 그린 것인지 알게 되더라도 절대 원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남들은 대체 어떻게 원래 그림이 보인다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작가인 커트 보니것은 작품 내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의 대표작 <제5도살장>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고양이 요람>에서도 유사한 방식을 활용했다. 한국인인 나에게는 실뜨기를 의미한다는 '고양이 요람'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다. 제목 하나 때문에 구입을 삼고초려할 정도였다. 그러나 독특한 제목과 이야기 초반의 어수선함을 견디면 보니것만의 매력에 빠져들고 만다. 앞서 언급한 <제5도살장>처럼 이 소설도 2차 대전을 다루었는데, 이번에는 전쟁에 휘말려 버린 평범한 군인이 아니라 일본을 제압해 버린 '원자폭탄'을 개발한 과학자를 다룬다.


그렇다면 과학자 한 명을 조명하는 이야기인가? 아니다. 연결고리가 전혀 없어 보이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개 방향을 보면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기 짝이 없지만, 사실 '전쟁'이라는 상황만 놓고 보면 작가가 이런 방식을 채택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들고 하늘에서는 폭탄이 쏟아져 내리는 아수라장에서 하나의 '서사'처럼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무언가를 오감으로 느끼는 것은 단연 최고의 자극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처럼 무언가를 직접 보고 피부로 느끼면 믿게 된다. 그렇게 쟁취한 믿음은 잘 변하지 않는다. 처음 믿음을 심었을 때만큼의 자극이 있어야 바뀔까 말까. 그래서 무엇이든 '보여주기식'이라도 하는 건 대단히 중요하다. 일단 믿게 만들어야 하니 말이다. 또 단순한 진실보다는 화려한 거짓이 인간을 현혹하기 쉽기에 역사 속 수많은 선동가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엄청난 공을 들이곤 했다. 나치만 해도 영화를 동원하고 예쁜 제복을 만들어 군인들에게 입히지 않았던가.


이 작품에서 보니것이 이야기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보고 믿기만 반복하는 '죽은' 인간으로 살면 안 된다는 것. 분별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천재 과학자는 진실을 구한다는 단순한 신념에 빠져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을 만들었다. 등장인물 대부분도 같은 맥락 속에 있다. 본 것을 믿고 믿음 하에 행동하지만, 실상은 누군가의 정교한 거짓에 속아 넘어간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그다지 정교하지도 않은 거짓이나, 누구도 자신이 거짓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고양이 요람> 속 주인공은 독특한 사이비 종교를 믿는 신자다. 그전까지는 기독교도였다. 작품 내 서술된 사항으로 따지면 현존하는 종교보다 훨씬 조악해 보인다. 그런 종교로 개종했다는 사실이 이상하다는 생각만 든다. 그러나 현실이 그와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다. 나조차도 대충 읽은 가짜뉴스에 속아 넘어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므로. 지금도 어떤 거짓에 혹해 진짜처럼 믿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숙고하는 자세로 들여다 보아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맹종은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매일매일을 시험에 드는 사람처럼 의심하며 살 수 없다. 게다가 나는 중요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일개 시민에 불과한데 무엇을 '완전히' 아는 게 가능한가? 거대한 트루먼쇼에 갇혀 그대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하지만 수동적인 태도가 제공하는 편리함에 지불한 대가는 '생각하지 않음'이 불러오는 끔찍한 재앙이다. 이런 맥락에서 '편리함'이란 외면에서 오는 가짜 안락함이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이야기는 차치하고 생각해 보아도 그렇다. 내 길지 않은 삶에서조차 대충 하자며 넘겨버린 일들이 어마어마한 결과를 일으켰던 적이 꽤 많다. 몇 가지 일화만 떠올려 보아도 그때의 철렁함이 다시 느껴질 정도다.


결국 나는 스스로를 조금 더 귀찮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이 세 문장 사이에 존재했을 수많은 과정과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나는 진정 보았으며, 진정 이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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