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육아
아이를 키우는 일과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은 같았다.
규칙적인 생활습관, 충분한 수면, 적당한 운동, 균형 잡힌 영양 관리를 해주니
아빠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
어떤 날은 공부방 아침 운동에 함께 나가서 산책과 명상을 하기도 했다.
뇌가 망가진 환자에게는 무엇보다 심리적 안정이 우선이었다.
"아빠, 제가 곁에 있어요."
이 한마디가 아빠를 가장 안심시켜드렸다.
돌 전 아이를 키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주 양육자와의 안정된 애착' 형성이듯, 치매 환자도 마찬가지였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생존을 맡길 누군가가 필요했다.
치매 환자를 돌본다는 것은 고통도, 두려움도, 수치심도 대신 견뎌주며
한 사람의 삶을 대신 살아주는 일이었다.
하루 세 끼 챙기고, 약 시간 지키고, 감정 기복을 달래고, 예상할 수 없는 행동들을 받아주는 일.
말귀를 못 알아들어도 화내지 않고, 엉뚱한 말에도 다정하게 반응해주고,
함께 대화하며 잠자리에 들 때까지 안전을 살폈다.
아빠는 한 달에 세 번 친구들 모임에 나가셨다.
나는 약속 장소까지 모셔다드리고 근처에서 대기했다.
아픈 늙은이를 반겨주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많지 않았다.
자신을 잊지 않고 연락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시며, 그날만 손꼽아 기다리셨다.
그 모임은 아빠에게 '내가 아직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존재의 증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은 흐릿해져도, 사람 사이의 온기만큼은 끝까지 잊지 않는게 치매 환자였다.
곁에서 지켜본 80대 노인의 삶은 애처로우면서도 그 시간들이 소중했다.
무너져가는 뇌 속에서도 붙잡을 희망이 있다는 것은 아빠에게 '삶의 의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그럭저럭 무탈하게 흘러갔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그 노력이 아빠의 심신 안정으로 이어졌다.
내 어깨에 올려진 짐은 무거웠지만, 마냥 무겁지만은 않았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즈음, 시어머니가 갑작스럽게 큰 병으로 입원하셨다.
오전에는 어머니 병원을, 오후에는 공부방을, 밤에는 아빠를 돌봤다.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고, 어머니는 이별할 시간도 주지 않고 세상을 떠나셨다.
병간호와 장례로 아빠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 아빠의 불안이 극에 달했다.
인지능력과 보행능력마저 떨어졌고, 급기야 센터에서 못 다닌다는 통보까지 받았다.
무엇을 슬퍼할 겨를도, 내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또다시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새벽마다 치매 카페 글을 읽고 검색했다.
좋은 요양원을 추천해달라는 글도 올렸다.
그렇게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았다.
아빠는 밤새 내 방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불안해하셨다.
공부방 아침 운동 갈 시간,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개학 후 바빠진 딸을 집에서 독립시켰다.
6학년이면 스스로 공부하고 자고 일어나서 학교 가는 일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나이였다.
"엄마, 나 일어났어. 양치하고 있을게. 전화하면 내려갈게."
오늘따라 유난히 목소리가 밝았다.
하루에 두세 번 먼 거리를 운전하며 생각에 잠겼다.
글을 쓰기도 하고, 그러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오늘 내 생각의 주제는 딸아이 어릴 때였다.
태어나서 20개월까지 밤이며 낮이며 그렇게 울던 아이.
세상의 빛과 소리, 온도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아이를
밤새 품으며 사랑으로 감쌌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내 상황과 정확히 맞물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치매 환자를 낯선 곳으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더 안고 갈 것인가.
운동을 마치고 다시 아빠 집으로 핸들을 돌렸다.
갑자기 악화된 상태라 약이라도 조절해야 할지 의사 상담이 필요했다.
병원에 모시고 갈 채비를 하며 나는 눈에 보이는 영양제 한 움큼을 입에 털어 넣었다.
병원 시작 30분이나 일찍 도착해 초조하게 의사를 기다렸다.
의사는 입원해서 집중치료를 권했고, 근처 요양병원을 추천했다.
의사의 자세한 설명에 아빠를 굳이 설득시킬 필요는 없었다.
이대로 가면 아빠는 내일부터 나와 떨어져 요양병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나와 정처 없이 운전했다.
만개했던 벚꽃이 며칠 만에 지고 없었다.
보고 싶어 하던 이듬해 꽃을 못 보고 가신 엄마.
벚꽃이 만개한 날 돌아가신 어머니.
올해 서둘러 꽃구경시켜드린 아빠.
그때 꽃구경을 시켜드린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밥 먹으러 가자"는 아빠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먹고 싶은 음식도 생각나지 않고, 이른 시간이라 문 연 식당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그저께 "얼큰한 게 먹고 싶다"던 아빠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대구탕 드시러 가실래요?"
"대구탕? 좋지!"
갑자기 힘이 났다.
이른 시간부터 문을 여는 그 집은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어설픈 숟가락질로 국물을 떠드시며, 음식 맛에 만족하셨는지 밝게 웃으셨다.
"아빠, 제가 더 잘 보살필 테니 믿고 따라와 주세요. 지금 병원에 들어가시면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들 못 하실 수도 있어요. 센터 가서 고집부리지 마시고, 배려하며 사람들과 잘 지내세요. 이게 지금 최선이에요."
간곡히 부탁드렸다.
말 안 듣는 5살짜리 아이에게 이야기하듯 어르고 달랬다.
다짐을 받고, 센터에 가서 원장님께 고개 숙여 사과드렸다.
내 아이들을 키우며 외부에서 문제 전화를 받은 적은 없었는데,
최근에는 아빠의 문제 행동으로 매일 몇 통씩 받고 있었다.
'치매의 최고 약은 사랑이다.'
치매 카페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그렇게 까칠하고 예민하던 둘째가 20개월 이후 순한 아이로 변했듯이, 아빠에게도 기적이 찾아올까.
말보다도, 그 어떤 약보다도, 함께 아픔을 견디는 것이 진짜 사랑일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하는 것, 그것이 내가 아빠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