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백맘 Oct 13. 2023

7. 사람이 변하는 순간.

역경 - 엄마의 성장

큰아이에게 보여준 ‘교육광 열혈 엄마’의 모습은 결혼 전 다닌 대기업에서 경험한 ‘학벌 사회’가 어긋난 욕망의 발화점이 되었다. 지방대를 나온 난, 죽죽 나열된 서열에 치이고, 머리에 치이고, 일에 치였다. 그곳에서 무능과 한계를 마주하며 자책했고, 체력적 한계까지 느꼈다. 자기 계발이나 성장에 관심 없고 힘든 일 앞에서 피하기만 한 20대를 보냈다.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학력’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님을 알고, 자식을 낳으면 무조건 좋은 학교에 보낼 거라 결심했다. 엄마의 어긋난 결핍이 자식에게 투영된 꼴이었다. 그 무렵, 정치적인 이유로 그룹 차원에서 밀던 사업이 접게 되자, 회사에선 명예퇴직 신청을 받았다. 해명하지 않고 퇴사할 절호의 기회에 조금의 망설임 없이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그리고, 1년 후 운명의 끌림에 의해 100일 만에 선봐서 결혼했다. ‘결혼’이 그다음 ‘직장’인 셈이었다. 힘들어서 회사를 나왔는데, ‘희생과 헌신’의 삶인 ‘가정주부’의 길을 갔으니 그릇된 선택이었다.


엄마의 삶을 답습했듯,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아이 낳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 줄 알았다.

약하고 힘이 없는 ‘새댁’은 도움만 바랐고, 맞춰줘야 할 귀하게 자란 신랑이 있었다.

결혼식 날, 신랑에게 건넨 손을 뿌리치고 다시 아빠 손을 잡고 싶었다.

그러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덜커덩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좋아했기에 내 새끼도 낳으면 잘 키울 줄 알았다. 아이를 예뻐하는 것과 내 아이를 키우는 일은 달랐다. 큰 아이 땐 밤마다 우는 아이를 안고 어르고 달래다 지쳐 친정으로 쫓아가는 철부지 엄마였다. 육아는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힘든 일이었고, 피하고 싶은 또 다른 일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힘들면 뛰어갈 든든한 친정이 있었고, 애 봐주고, 저녁 먹이고, 반찬까지 싸주는 엄마가 있었다.


내 몸을 더 쓰지 않아도 내 것을 지켜 주는 사람들.

부모가 든든히 지켜주고 계셨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엄마의 도움으로 연명하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엄마가 아팠다.

삶의 기둥과 같았던 엄마가 무너졌다.

엄마의 남은 생을 지켜 주기 위해, 아이를 키우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중심 잡고 살아야 했다.

큰아이 4살부터 간병을 시작으로 첫 고난이 시작되었다.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지만, 세 가지 일 앞에서는 변한다고 한다.


누가 죽었을 때, 망했을 때, 아플 때.

난 변해야 했다.


그전과 다른 삶을. 그것도 또렷한 정신으로, 정신 차리고 살아내야 했다.      


간병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엄마는 분당에 사는 언니집에 있으며 혜화동 서울대까지 진료를 다녔다.

5살 어린아이를 데리고 병원 진료며 일상을 챙겼다.

언니는 돈을 대며, 난 몸을 쓰며 엄마를 살리려고 갖은 힘을 썼다.


그 무렵, 언니는 ‘남들보다 좀 늦게’ 결혼 10년 만에 아이를 낳았다.

‘부모에게 잘하니, 자식 복을 받는다’라는 주위 통상적 축하 속에 언니집에는

아픈 엄마, 시어머니, 아빠등 어른들로 북적였다.

어떻게 얻은 자식인데, 도움도 못주고 신세만 진다며 엄마는 사돈에게 많이 미안해하셨다.


엄마는 항암으로 퉁퉁 부은 몸으로, 딸의 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새 생명을 어르고 달랬다.  

엄마방에는 새벽마다 불이 켜졌고, 온 가족을 위해 기도했다.


한 방에선 아이가 울고,

다른 방에선 기도 소리가,

부엌엔 밥솥이 돌아갔다.

그래도 그 시절이 행복했다.

엄마가 살아 계셨고, 온 가족이 자주 얼굴 볼 수 있었으니까.      


엄마가 남긴 크고, 작은 일들은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챙김을 받는 사람’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 되었고,

 아빠의 일상도, 결혼 안 한 동생을 챙기는 것도 내 몫이었다.


명절이면 양가를 오가며 제사를 지냈고 혼란한 상황에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언제 철들래? 뭐 하나 시키는 것도 힘들어.”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얼굴을 붉혀야 했다.

그제야 이런 잔소리를 왜 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도대체, 나 뭐 하고 살았지?’ 부끄럽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냥 철없다’라고 치부하기엔 설명하기 힘든, 나조차 용납되지 않은 ‘어린 나’가 있었다.

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나’를 들여야 봤고, 살아가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변해야 했다.

‘철없음’이 대부분인 흩어진 기억들을 모았다가 정리하기 쉽지 않아 한동안 그냥 묻어뒀다.


발 밑에 떨어진 불들도 끄기 바쁜, 엄마의 죽음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던 시기에,

밤마다 베갯잇 위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끝없이 밀려오는 후회 속에, ‘나’를 들여다보며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나이 마흔에 겁 없이 둘째를 낳고 더 큰 시련이 시작되었다.

엄마의 선물이라 생각하며 기뻐했지만, 첫째 때와 달리 주위 도와주는 손 없이 키우려니 밥 한술 뜨는 것조차 힘들었다. 사춘기 큰아이와 매일 늦는 신랑, 갓난아기를 안고 달달한 커피 믹스 한잔으로 식사를 때우며 하루하루 시간만 가기를 기도했다. 내 몸뚱어리 하나 건사하지 못하면서 아이들 뒤만 쫓고, 도와주지 않는 신랑만 탓하다 심지어 독한 병까지 얻었다.


게다가, 수술하러 잠시 자리 비운 사이 자기 할 일 하나도 못 하는 큰아이.

고객과의 분쟁으로 하루아침에 회사를 나온 신랑.

어린 꼬마가 아픈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열심히 살았는데 도대체 어떤 연유로 끊임없이 시련이 찾아오는지 원망만 쏟아냈지만, 눈물을 감추고 불안한 아이들을 위해 살아내야 했다. 큰아이는 과학고로 진로를 정했고, 집에서 공부방을 오픈하며 혼란한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곤, 이 고난이 지나가기를 모든 신께 빌었다.  

   

10년 전


작가의 이전글 6. 어느 결혼식에서 본 부모의 빈자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