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낡은 운명의 철거

아들의 땀방울

by 고백맘

그날 밤 사고의 충격을 겨우 마음을 추스를 때쯤 집 전체를 수리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우리 집에 물이 새서 아랫집에 피해를 줘서 재발 방지를 위해서 전체를 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명절에 내려온 큰아이를 붙들고 짐 정리를 시작했다.

창고마다 가득 쌓인 짐을 보며 이제껏 내가 살아온 내 삶을 보는듯했다.

이사 때마다 이삿짐센터에서 정리를 해줬기에 구석구석 들여다보며

살지 않아 이렇게 많은 짐이 쌓여 있는지 몰랐다.


며칠 뒤부터 수리를 들어가야 했기에 모든 짐을 다 빼야 하는 상황이라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옷에 먼지가 묻고 땀범벅이 되어 기차 시간이 다 되어서야

허겁지겁 올라가는 아이를 보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끝까지 웃으면서 "엄마, 더 할 거 없어?" 큰아이의 18번 레퍼토리인

”나, 괜찮아. “가 또다시 흘러나왔다.



둘째와 열한 살 터울이 나는 큰아이.

대학 입학을 앞두고, 녀석이 집을 떠나던 날이 생각났다.

아이가 울며 말했다.


“난 누구 믿고 살아? 엄마도 아프고, 아빠도…”

“너 자신을 믿고 살아. 엄마가 다른 건 몰라도, 그 힘 하나는 길러줬어.”


그렇게 단호히 말하며, 세상 밖으로 밀어냈다.

그 후로 아이는 손을 벌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생활했다.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제 생활을 꾸렸고, 어떻게든 앞가림을 해냈다.

그런데 그 대견함이, 되려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대학생인데도 멋 한번 부리지 않고, 목이 다 늘어난 낡은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떨어져 살며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어 안타까웠다.


아이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옷 필요 없어. 돈 필요 없어. 나, 괜찮아.”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보았다.

나의 낡은 희생이, 아이의 단단한 자존감으로 대물림되었음을.


무엇이 괜찮다는 말인가?

괜찮지도 않은 상황에서도 엄마를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가려는 아이를 보며

마음이 찢어졌지만, 한편으로는 50년 세월을 보상받는 마음도 들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웃음을 잃지 않았던 아들.

그 모습을 오롯이 지켜본 딸아이.


그 아이는 그 순간, 세상 그 어떤 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가장 위대한 가르침을 오빠의 어깨너머로 보았다.


‘책임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아들은 말이 아닌, 땀방울 속에서 온몸으로 그것을 증명해 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은 예전에는 상상조차 못 했었다.


그 아이의 사춘기는, 춥고 외로운 산에 갇힌 거대한 바위(戊土)가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단단하고 차갑게 존재하는가?” 하고

자신의 존재를 향해 몸부림치는, 거대한 지진과도 같았다.


자신의 쓰임을 찾지 못한 힘은 스스로 균열하고 부서지며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려 했다.

‘엉망이 되어 아이가 잘못되지 않을까’ 두려워,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만약, 이 아이가 돈이 넘쳐나는 부유한 집안의 따뜻한 온실 속에서 태어났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아무런 시련 없이 그저 차갑고 녹슬기만 하는 거대한 무쇠 덩어리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 혹독했던 가난과 시련이, 아이를 나약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바위를 깎고 쪼개어 그 안에 숨겨진 보석의 결을 드러나게 한 ‘망치’였던 셈이다.


평생 비바람을 막아주던 엄마에게,

이제는 자신의 가지를 뻗어 그늘이 되어 주려 하는 아이.

그저 밥 한 끼 차려주며 등을 두드려주는 그 따뜻한 온기(火)가,

세상 그 어떤 부유함보다 더 뜨겁게 아들의 마음을 지펴줄 불씨가 될 것이라 믿는다.


이제, 아들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딸아이에게 적용할 때가 왔다.

내년 고입을 두고 많은 고민을 하는 딸아이.


어미 새가 다 자란 새끼를 둥지 밖으로 밀어내는 마지막 사랑처럼,

함께 있으면 따뜻하고 안전하겠지만, 저 넓은 하늘을 제 날개로 나는 법을 배우게 하려고,

기꺼이 그 가슴 아픈 이별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 아이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겨울의 어미'가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날아갈 것을 믿고 지켜봐 주는 '봄의 어미'가 될 준비를 마쳤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사고를 겪고 예정에도 없던 낡은 집을 정리하며

나의 낡은 운명(運命)을 철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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