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ga 신염 투병일기
먹는 낙으로 사는 여자였다.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마흔을 바라볼 때쯤 되니 소화가 점점 되지 않았지만 적게 먹더라도 그날그날 먹고 싶은 게 많았다. 퇴근하고 남편이랑 배달 어플을 정독하는 수준으로 진지하게 보며 고민에 빠지곤 했다.
그랬던 나의 요즘 식단은 마치 토끼가 주방장인 식당에서 나올 법한 메뉴다. 지난여름 끝 무렵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쉬는 동안 간단하게 소변 검사와 피검사를 한 후 내 생활은 그 전과는 사 뭇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소변검사에서 내 신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대학병원을 예약하고 조직검사까지 두세 달이 걸렸던 것 같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혹시나 하는 기대와 체념을 반복하며 무력감에 빠졌다.
조직검사 결과는 iga 신염 3기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까지는 위험도가 크진 않다고 담당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지금 상태에서 5년 후 투석(신장이 완전히 기능을 못하는 상태)할 가능성은 통계적으로 5%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냥 기쁠 수 없었다. 그럼 10년 후엔? 15년 후엔?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을 이럴 때 쓴다는 것을 깨달은 몇 개월이었다. 신장이라는 녀석은 한번 병이 들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장기라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내가 불치병에 걸리다니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현실감이 없었다. 의사도 모르는 이 병의 진행과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떨쳐버리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너무도 나약한 나였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나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가끔 매체에서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볼 때면 항상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 이면에 나의 일이 아니라는 안도감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고약하게도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에서 자신의 행복을 상기시키고는 한다. 지금도 나는 나보다 더 힘든 상황의 그 누군가를 상기시키며 애써 위로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나의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인간의 불행을 무한대이니 그때도 스스로 위로하고 있으려나..
스스로 내려놓은 지난 시간 위에 치유의 시간을 쌓아가려 한다.
지난 몇 개월 남편이 나를 보고 세상 다 산사람 같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때 마침 일을 그만두었고 추적검사로 인해 잦은 병원 출입 외에 밖을 나가지 않았다. 코로나도 나의 칩거 생활에 한몫을 했지만 저염, 저 단백 식단을 해야 하는 나에게 친구와 약속을 잡는 것은 꺼려지는 일이기도 했다. 집에 혼자 있은 시간이 길어지지니 이런저런 잡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졸업 후 대부분의 직장이 학원이었다. 10년을 학원 강사로 살면서 연차 반차 같은 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 건강검진을 미루던 나였다. 좀 더 일찍 검진을 갔으면 초기에 치료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와 자책으로 하루를 마무리 짓곤 했다.
몇 개월의 시간을 이렇게 허비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나 보다 충분히 감정을 소비하고 나니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길어질 것 같은 나의 칩거생활에 나의 감정들을 담아 치유의 글쓰기를 해볼까 한다. 나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앞으로의 수많은 사건들로부터 무너지지 않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