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날 준비, 재점검의 시기

여덟 살 아이의 여름(2022.06-2022.08)

by 하이리



낙인



동네 친구를 만들면서 두려워하던 일이 하나 있었다.


낙인찍히는 것. 한동안 같은 아파트 단지이자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과 친해지려 노력했다. 등하굣길마다 마주치는 경우도 잦았고 자연스레 놀이터에서 만났고 때로 약속을 하고 놀러 가기도 했다. 처음엔 조심스러웠지만 아이에게 사회성을 길러주는 기회일 것 같아 자주 만나 어울렸다.


그런데 자꾸 내 아이가 튀는 일이 생겼다. 짜증을 내고 소리를 질렀다. 술래를 하지 않겠다고 버티고, 달리기 시합에서 졌다고 울먹였다. 다른 아이가 한 실수에 대해서는 얄미울 정도로 그 엄마에게 고자질했다. 서너 명의 아이가 달리기 시합을 하다 한 명의 아이가 실수로 다른 아이를 밀쳐 넘어졌는데, 그 아이가 일부러 넘어뜨린 거라며 말하는 식이었다. 나는 상대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러면 안돼. 실수로 그런 거야. 나는 아이의 말을 정정하는 것으로 상황을 넘겼다.


방학 첫날, 동네 친구 중 한 명과 근처 계곡에서 놀기로 했다. 마침 다른 친구들도 같이 만난다 해서, 자연스럽게 여러 아이가 한자리에 모였다. 이런 날을 위해 서너 명이 한데 오를 수 있는 투명 보트도 주문해 두었다. 아이들이 함께 보트를 타며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곤 했다. 술래가 있는 놀이도 아니고, 서로 보트에 올라 밀어주고 끌어줄 거라 생각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는 다른 친구들이 보트에 오를 때마다 물이 들어온다며 짜증을 냈다. 친구들이 올라탈 때마다 보트가 살짝 기울어졌다. 타지마, 만지지 마. 아이의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한 엄마는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아마도 내 아이가 짜증을 내는 상황을 많이 봐서 그랬겠지만, 자신의 아이에게 보트에 아예 타지 말라고 단호히 말했다. 그 아이는 보트에 오르려다 결국 보트에 타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친구를 따라갔다. 결국 남아 있는 건 내 아이 한 명. 나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도 나를 보았다. 엄마 왜? 아이가 기분 나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아이를 향해 말했다.

"이젠 아무도 네 보트에 타지 않을 거야."

이후로도 아이는 한두 번 더 짜증을 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창피한 거야. 이렇게 사람 많은 데서 집에 가기 싫다고 우는 건 창피한 거야. 엄마가 너한테 몇 번 경고했는데도 네가 계속 짜증을 냈으니까, 엄마는 집에 갈 거야. "

우리는 곧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우리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다. 나는 싫다고 말하는 아이를 앞세우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아이에게 상처 주는 말들을 했다.

"친구들은 너를 좋아하지 않아. 그렇게 짜증내고 화만 내니까 친구들이 네 옆에 오지 않는 거야. 그래서 네가 보트도 혼자 탄 거야. 혼자 있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돼. 그럼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 그런데 친구를 사귀고 싶으면 친구 말을 좀 들어. 친구에게 짜증 내지 말고 친절하게 얘기해."


언제나 반복되는 일이다. 다른 친구와 다툼이 생기고 그 자리에서 친구에게 사과하고, 그러다 상황이 심각해지면 먼저 자리를 뜨는. 엄마들을 보다 보면 내 아이가 누구와는 더 친했으면 좋겠고 누구와는 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는 마음의 방향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나도 이해한다. 이왕이면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는 친구와 내 아이가 친하길 바라는 마음, 반면 화를 잘 내고 짜증을 달고 다니는, 친구들과 분쟁을 일으키는 아이와는 멀어지고 싶은 법이다. 내가 아무리 사람 좋은 얼굴을 가장하고 있어도, 이 관계는 아이를 중심으로 이어지기에 내 태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 친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아이의 친구를 만드는 일이므로.


아이에게 심한 말들을 쏟아내고 난 뒤 나는 울고 말았다. 사회성을 이유로 동네 아이들과 만나는 일은 당분간 하지 않으려 한다. 이런 일이 많아질수록 아이에 대한 낙인은 점점 확고해질 것이다. 마음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엄마, 나 그냥 친구 안 사귈래. "

"그렇게 계속 짜증내고 화낼 거면 그냥 친구 없이 혼자 있어. 그러면 이런 일도 없을 거야."라는 내 말에 아이가 대답한다. 그래, 나도 친구 안 사귈래. 외롭고 슬프지만 오늘은 좀 혼자 있을래. 위로가 필요하다.





내가 어렸을 적 엄마에게 들었던 부정적 표현이 하나 있다.


너 참 유난스럽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 엄마에게 호되게 혼난 기억도 없는데 이 말만은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른들에게 버릇없이 행동한다던가 장난을 심하게 친다던가 할 때마다 엄마는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너 정말 유난스럽구나. 나는 이 같은 말을 듣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자기 검열을 잘하는, 남 눈치 잘 보는 소심한 아이가 되었다.


엄마에 대한 원망 같은 건 전혀 없다. 일이 전부인, 자식에게 무관심한 아버지와 시부모를 모시느라, 삼남매를 보느라(내 위로 오빠 둘이 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엄마의 사정을 이해한다. 내가 원하는 만큼 부모의 관심과 정성을 누리며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었지만 물질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자랐다. 솔직히 나는 지금도 부모님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한다. 큰일이 있을 때 언제나 커다란 버팀목이 되어 주시는 분.


그 친구가 너를 싫어할 거야. 어느 누구도 널 좋아하지 않을 거야. 엄마도 이런 네가 싫어. 너는 영영 혼자가 될 거야. 트러블이 생길 때마다 나는 이 말을 내뱉는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곤 했지만, 이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아이는 종종 분쟁을 일으킨다. 나는 이 같은 상황을 참지 못한다. 내 말은 왕왕 거칠어진다. 언어폭력이다. 또래와 함께하는 기회가 많아질수록 아이는 나에게 부정적인 피드백을 더 자주 받는다. 이게 과연 사회성을 가르치는 길인가? 오히려 엄마의 지적을 많이 들을수록 아이가 움츠려 드는 건 아닐까? 어쩌면 친구를 만드는 게 아니라 친구를 잃어버리는 게 아닐까?


천천히 점검을 해 보았다. 아이가 액팅 아웃과 같은 과한 신경질을 보이는 경우는 대부분 대여섯 명의 무리가 모일 때 발생한다. 만나는 아이들의 수가 늘수록 아이의 텐션이 올라간다. 반면 한 두 명 정도 모일 때는 흥분하긴 하지만 큰 문제를 일으키진 않는다. 또한 새 친구는 되도록 만나지 않는 게 좋다. 익숙한 무리에 뉴페이스가 합류하면 그 또한 아이에게 자극을 준다. 또한 여러 아이들이 모였다면 이들을 통솔한 어른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놀이 내내,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정리가 된다. 만나는 친구의 수는 가능한 소수로, 아이가 충분히 알고 있는 친구들을 중심으로, 가능한 어른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후회가 밀려온다. 사회성 욕심에 내가 무리해서 또래 무리에 너를 집어넣었구나. 이토록 남다른 너를 몰아세웠구나.




점검은 끝났다.
아이를 다그치지 않겠다.
방향을 가르쳐 주되 천천히 기다리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