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아이의 여름(2022.06-2022.08)
노는 데도 창의력이 필요하다.
근처 계곡에 왔다. 친구 없이 혼자 와서 그런지 아이는 차분하다.
튜브에 몸을 기댄 채 아빠가 이끄는 데로 왔다 갔다, 언젠가 워터파크에서 보던 레이지 리버에 몸을 맡긴 느낌이다. 게으른 물놀이. 다른 아이들을 보았다. 유치원 정도 다니는 아이부터 초등학교 저학년, 고학년까지. 중학생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주말에도 학원에 가거나 아니면 더는 엄마 아빠 따라다닐 나이가 아닌 거겠지. 혼자 놀든 무리 지어 놀든 아이들은 즐거워 보였다.
그 가운데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계곡 옆 돗자리에 누워, 미니 자동차를 갖고 노는 남자아이를 보았다. 돗자리 가장자리에 놓여 있는, 햇빛에 말리고 있는 수영복을 보면 물놀이를 끝내고 쉬고 있나 생각이 들다가도, 미니 자동차를 손에 쥔 채 나른하게 누워있는 아이를 보니 이 아이도 노는 걸 잘하지 못하나 싶다.
노는 게 쉬운 일 같아 보여도 사실 노는 데에도 창의력이 필요하다. 물속에서 방방 뛰기도 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물장구치고, 물길을 거꾸로 오르고 튜브에 다리를 올려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도 한다. 뜰채를 갖고 다니며 작은 물고기들을 쫓는다. 아이들은 모름지기 작은 것 하나에도 놀이 거리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잇몸이 다 보일 정도로 활짝 웃을 수 있어야 한다. 어른 눈에 저게 무슨 재미인가 싶어도, 아이들이라면 신나서 들뜨는 게 맞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건강하다고 믿는다.
홀로 튜브를 탄 내 아이는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아빠가 이끄는 곳을 따라 튜브에 몸을 맡긴 채 따라갈 뿐이다. 계곡 맨 위에서 아래로 무한 반복. 내 눈에 따분해 보이는 일이지만 아이는 그 반복에서 재미를 찾는지도 모른다. 아주 어렸을 적 문을 열고 닫고 반복하며 놀았던 것처럼. 생각해 보니 아이는 요즘도 마법 천자문을 반복해서 읽는 것을 즐긴다. 책이 40권이 넘어서 그렇지, 아마 각 권마다 대 여섯 번은 족히 읽었을 것이다. 내게 마법 천자문 퀴즈를 내기도 하고 '황천길'이라는 여덟 살 아이에게 생소한 단어도 잘 사용한다. 이런 이유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서 만큼은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겠지. 그 지식이 아이의 자립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방학 동안 해외여행을 가려고 한다. 런던과 파리.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올해까지 써야 할 항공 마일리지가 남아 있었고 여름방학 기간 동안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며 런던에는 내 친구이자 아이의 친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 아이의 영어 공부를 위해 영국행을 선택한 친구는 방학기간에 한번 놀러 오라며 톡을 남기곤 했다. 그래! 가자, 한번 가보자. 명색이 아이와 함께 하는 세계일주가 인생 꿈인데 친구가 오라고 하는 영국에 못 갈 이유는 없어 보였다. 10년 전인가 런던에 한번 가 본 적 있기도 하고, 이왕 가는 김에 다른 나라도 경험하고 싶어 이웃 국가 프랑스 파리를 일정에 넣었다. 파리 근교에 있다는 디즈니 랜드도 방문할 예정이다.
여행을 앞두고 고민이 많다. 과연 우리가 이 여행을 즐길 수 있을까? 내 아이가 여행의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초등학교 저학년과의 해외여행은 돈을 바닥에 뿌리고 오는 일과 비슷하다던데, 더욱이 내 아이와 같은 예민한 아이들에게 여행은 일상에 대한 커다란 변화와 자극으로 다가온다던데... 에라 모르겠다. 여행 중 아이와 엄청나게 많은 갈등을 겪을 게 너무도 뻔하지만 그래도 아이와 평생 여행이란 걸 안 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번에 그냥 큰 마음먹고 하자. 대신 아이에게 많은 걸 보여줄 욕심을 버리고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 위주로 동선을 짰다.
과학에 관심 있는 아이를 위해 과학 박물관과 자연사 박물관을 이틀에 걸쳐 넣고, 사물의 작동 원리에 관심이 많으니 타워 브릿지 리프팅 시간을 검색했다. 타워 브릿지 엔지니어 룸 관람도 할 예정이다. 높은 곳을 좋아하는 아이니 런던 아이는 필수 코스. 런던 근교의 그리니치 천문대도 일정에 넣었다. Seoul 127도, 본초자오선을 보면 아이가 좋아할 것 같다. 파리는 디즈니 랜드를 중심으로 에펠탑 리프트를 예약했다. 마지막 날엔 배를 타고 세느강을 따라 돌고 올 예정이다. 일정은 최대한 여유롭게, 중간 중간 아이가 뛰어놀 수 있는 공원이나 놀이터도 빠지지 않고 넣었다.
어쩌면 아이는 런던과 파리 지하철에 푹 빠질 수도 있고, 자동문 시스템이 아닌 수동으로 문을 열어야 하는 외국 지하철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지도. 아마 아이는 런던 2층 버스를 오래도록 타는 것만으로도 만족할지 모르겠다. 모든 해봐야 아는 법. 최근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오은영 박사는 아스퍼거 증후군 아이에게 다양한 경험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줄 수 있어 좋지 않다고 언급했지만, 비행기를 12시간 넘게 탄다는 것만으로도, 에펠탑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만으로도 기대에 찬 아이를 보며 나는 일단 간다.
어쨌든 가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아이와 함께 걷는 길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