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살 아이의 여름(2022.06-2022.08)
여행이 우리에게 남긴 것
아이는 생각보다 더 많이 여행을 즐겼고 생각보다 더 잦은 불협화음을 냈다.
며칠 신세를 지기로 한 친구의 아들을 상대로 하루에도 몇 번씩 화를 내는 소리가 들린다. 작년만 해도 이렇게까지 다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그 정도가 심하다. 목청 높여 소리 지르며 화를 내는 액팅 아웃. 불행하게도 내 아이와 친구의 아이 둘 다 해당한다.
이쯤에서 고백을 해야겠다. 친구의 아이에게 아스퍼거 증후군 성향이 느껴진다. 이를 친구에게 말한 적은 없다. 친구는 그저 자기 아들을 고집 센 남자아이라고 여길뿐이다. 내 아이가 자폐 스펙트럼 진단을 받은 사실도 친구는 알지 못한다. 말한 적이 없으니 모를 수밖에. 나는 친구에게 아이가 상당히 예민하며 또래에 비해 화를 참지 못하는 것 같다고 언질을 주었다. 안녕이라 인사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필요할 때만 적극적으로 말하는 아이. 자신의 규칙대로 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는 아이. 양말 솔기가 걸리적거려 양말을 뒤집어 신는 아이. 책이나 장난감만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혼자 노는 아이. 이 밖에도 여러 정황들이 있지만 나는 친구에게 아무 말 못 했다. 아이를 데리고 상담센터를 가든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든 그건 철저히 부모의 선택이다. 그 안에 내 자리는 없다.
아이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 생각이 아예 잘못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어쩌면 아이의 성향이 경미해서 개입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아이가 남다르지만 부모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물 수도 있다. 아스퍼거 증후군 성향이 보인다는 표현도 정확하진 않다. 내 아이가 어렸을 적 만난 한 전문의는 '자폐면 자폐지, 자폐적 성향이란 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며 반문한 적 있다. 그럼에도 자폐 스펙트럼은 범주성 장애이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이고 아닌지 선을 긋기 어렵다. 그래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폐 성향이란 표현이 나온 거겠지. 가령 신장이 하위 5% 에 해당하는 아이들을 저성장이라 규정할 때, 하위 5.1%에 해당하는 아이를 저성장이 아니라 말할 수 있을까?
아이를 키우며 잔뜩 예민해진 내 탓도 있겠지만, 주변에 자폐적 성향이 있는 아이들을 종종 본다. ADHD가 의심되는 아이는 더 많고 아스퍼거 증후군도 그렇다.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자신의 아이가 말이 너무 많고 목소리 톤이 높아 학교에서 지적을 자주 받는다며 ADHD가 아닐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나는 '궁금하면 병원에 가보라.'고 대답했다. 내 마음속에도 친구와 비슷한 의심이 들지만 나는 그걸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병원에 가기로 결심했다면 이왕이면 ADHD 임상 경험이 많은 전문의를 찾아가라고 말할 뿐이다.
병원에 간다 해도 뭐가 달라질까? 이 정도 자란 아이들이게 획기적인 치료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약물 치료가 전부일 텐데, 여기에 더 추가한다면 상담이나 사회성 치료 정도? 나는 뾰족한 해결책을 주지 않는 현실을 잘 알고 있다.
부모가 아이의 상태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는 분명하다. 다만, ADHD든 자폐 스펙트럼 장애든 성향만을 갖고 있는 아이들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내 아이도 자폐적 성향이 경미하지만, 두드러진 영유아기 발달 과정 때문에 부모가 일찍 아이의 다름을 캐치한 경우다. 아직까진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하고 있고, 친구와 상호작용 하는 게 어렵긴 하지만 그런대로 큰 문제를 비켜가고 있으니, 이 정도면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아이의 '다름'을 너무도 잘 인지한 나머지, 지레 걱정 근심 가득한 눈으로 아이를 보는 것보다는 어찌 됐든 '보통'의 편에 서서 아이의 남다른 개성을 바라보는 게 더 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장애 진단을 받는 것과 아닌 것의 간극은 거대한 차이다.
여행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여행에 대한 기대는 바닥이었다. 거의 없는 수준. 돈만 쓰고 고생만 하고 올 거란 생각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여행 계획을 짜고 동선을 정하고 티켓을 예약했다. 아이는 놀랍게도 내가 정한 일정의 대부분을 소화해냈다. 여유를 두고 짠 일정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행인지라 어느 정도의 무리는 자연스레 수반되는데, 아이는 큰 차질 없이 여행 일정을 따라왔다. 걷는 걸 싫어하는 아이는 딴짓을 일삼으면서도 엄마 아빠를 놓치지 않았고, 음식은 가리지 않고 뚝딱 해치웠으며, 무엇보다 여행을 다니며 놀라움, 즐거움, 호기심을 마음껏 표현해 주었다.
나에게 이 여행은 아이와 24시간 내내 붙어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시켰다. 나는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은근슬쩍 피해왔다. 학원이나 학교에 데려다주고 음식을 차려주고 숙제를 봐주는 일 외에 나는 아이와 함께 하는 일이 없었다. 나는 아이와 놀지 않았다. 필요한 대화 외에는 하지 않았다. 내가 궁금한 것들, 가령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던가, 친구 중 누가 가장 좋다던가, 선생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에 대한 질문에 아이는 묵묵부답이었고, 반면 아이가 말하는 것들, 가로등 하나가 꺼져 있다던가, 지하철 가는 길의 기둥이 83개 라던가에 나는 흥미가 없었다. 우리는 함께 있어도 대화다운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시간이 버거웠다. 그래서 밖으로 나갔다. 친구를 찾고 즐길 거리들을 물색했다.
2주가 가까운 이번 여행 동안 우리는 늘 함께 했다. 같은 곳을 바라보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소 상투적이지만, 에펠탑을 보며 놀랐고 런던 아이를 타며 아찔하다, 아찔하지 않다며 의견을 나눴고, 디즈니 랜드의 불꽃놀이를 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즐거웠다.
아이와 함께했던 시간은 아이의 사회성에 대한 내 불안도 잠재운다. 지금까진 아이의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기회만 있으면 달려들었다. 나와 맞는지 내 아이와 맞는지 고려하지 않고, 또래와 함께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기회만 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가운데 아이가 두드러진 행동을 하면 아이를 나무랐다. 불편했다. 나도 아이도. 나는 이제 여유를 찾는다. 사회성은 여전히 아이에게 필요한 요소지만 그걸 하루빨리 획득하기 위해 일부러 자리를 만들지 않겠다. 엄마의 노력으로 획득한 자리는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을 떠올리게 하기 마련이니까. 예전의 내 노력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런 노력이 있었으니 지금과 같은 깨달음이 있는 거겠지.
지금 이 생각은 나에게 꽤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