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아홉 살 아이의 겨울(2024.12-2025.02)
1.
하루 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울적해서 아이에게 말했다.
"엄마가 기분이 너무 안 좋아. 엄마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 엄마를 좀 위로해 줄래?"
"오늘 엄마 마음대로 된 일을 한번 생각해 봐. 내가 방금 전에 엄마 말대로 엄마랑 거래를 했잖아."
밥을 먹다 물을 달라는 아이에게 "냉장고에서 네가 꺼내 먹어"라고 말하던 중, 때마침 아이가 학교에서 받은 과자가 눈에 띄었다. "이 과자를 엄마한테 주면 너한테 물을 꺼내 줄게. 엄마랑 거래를 하는 거야."라고 협상안을 제시했다. 다소 장난기 어린 제안이었는데, 아이가 선뜻 "그래"라고 대답했다. 대신 자기가 밥을 다 먹은 뒤에 같이 먹자고 하면서.
몇 분 뒤, 아이는 내가 과자를 먹는 속도보다 몇 배로 빠르게 과자를 해치워 버렸지만,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나에게 아이가 건넨 그 말이 대견하다. "방금 전에 엄마 마음대로 거래를 할 수 있었잖아." 네가 벌써 이렇게 자랐구나.
2.
아이와 나, 둘 다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갔다. 대기실에 앉아 있다 코를 푸는데 아이가 말했다. “왜 더럽게 코를 풀어? 밖에서 풀어.” 서운하고 민망한 마음에 "지는, 코딱지도 먹으면서..."라고 응수했다. 코딱지를 파서 입에 넣는 버릇은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더럽지만 솔직히 나도 어렸을 때 코딱지를 먹곤 했다.
"너는 왜 코딱지를 먹니?"
"짠맛이 나잖아."
"혹시 학교에서도 코딱지를 먹니? 애들이 보면 놀리지 않아?"
"아니, 학교에서는 숨어서 먹지."
코딱지를 먹는 데에도 아이만의 이유와 규칙이 있다. 남편은 이런 아이를 보며 기겁하지만, 나는 은근슬쩍 모른 척 넘긴다. 집에서만 대 놓고 먹고 밖에서는 한 손으로 가린 채 먹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라는 나름의 논리를 펼치면서. 동시에 코딱지 먹는 것이 짠맛(강한 자극)을 추구하는 촉각 추구 중 하나인가, 머리를 굴리기도 한다. 아이는 맵고 짠 것을 좋아하고, 씹었을 때 텍스처가 균질하지 않은, 이를테면 비계와 살코기가 섞인 고기를 먹지 않는다. 대신 으깬 고기나 순살 부위만 골라 먹는다. 자폐에 대한 여러 정보를 아는 것이 아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나는 가끔 보통 부모와 같은 반응을 하고 싶다.
"에이, 더러워! 코딱지 먹지 마." 손사래까지 곁들여 이렇게 얘기할 때는 속이 시원해진다. 엄마가 코를 푸는 것도 참지 못하는, 인정사정없는 아이에게 "지는... 코딱지도 먹으면서...."라고 말하고 나니 솔직히 고소하다. 곧바로 미안한 마음에 이 말을 덧붙이긴 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엄마 기분이 안 좋잖아. 엄마가 감기에 걸려서 그래."
3.
새해 목표는 영어 공부와 운동이다. 절대 변하지 않는 새해 목표다. 아이에게 새해 목표를 물었다. 아이가 대답했다.
“나는, 글자를 또박또박 쓰는 거야."
"우와~ 엄청 멋진 목표다."
소근육이 약한 아이는 가위질부터 애를 먹었다. 연필을 잡고 글자를 쓰는 것도 힘들어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의 글씨는 지금도 개발괴발. 매주 감사일기를 쓰는데, 이걸 제대로 해석하는 나 자신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게다가 띄어쓰기도 하지 않으니 더더욱 알아보기 힘들다.
가끔씩 아이에게 "글자, 또박또박 써야지."라고 얘기하긴 했다. 끝처리가 애매해 숫자 0과 6, 9와 4가 비슷해 보이는 수학 학습지를 채점하며 "엄마라서 맞게 해주는 거지, 선생님이 채점하면 바로 틀리게 할걸."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는데, 바로 그 덕분인가? 듣는 둥 마는 둥 했던 아이가 새해 목표로 이렇게 반가운 생각을 하다니. 새해 목표야 작심삼일은커녕, 작심삼초 정도로 끝날 테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 목표만은 마음껏 칭찬해 줘야지.
2025년, 나라도 새해 목표를 이뤄야지!
그래도 혹시 알아? 아이가 자신의 목표를 위해 노력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