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최재훈
고도로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문장들
책에 수록된 예민한 사람 테스트 결과 나는 16점, 기준점인 14점 보다 위에 있으니 HSP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책을 쓴 작가가 만점인 23점을 받은 것과 비교한다면 나는 비교적 낮은 수준의 HSP에 가깝다. 어쨌거나 내가 예민한 사람인 건 맞는데, 문득 예민하지 않은 사람이 있나 생각도 든다.
나는 왜 남들보다 쉽게 지칠까,라는 제목도 그렇다. 나는 왜 남들보다 지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바로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의 시대,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떠도는 만큼 혼자 살아남아야 하는 초경쟁의 시대, 이 안에서 지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사실 HSP는 정식 진단명이 아니고 임상심리학자 일레인 아론 Elaine N. Aron이 처음 사용한 용어다. 타인과 비교해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민하다는 게 정확하게 뭘까? 작가는 HSP의 특징으로 초감각, 초공감, 초심미안, 이 세 가지를 든다.
먼저 초감각은 감각 처리 기관의 민감도가 높아, 작은 자극도 크게 받아들이거나 여러 자극을 한꺼번에 받아들여 쉽게 지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폐 아동의 특징으로 언급하는 감각 예민이 초감각과 비슷하다. 자폐의 경우 초감각 대신 감각 통합에 문제가 있다고 표현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감각통합치료를 받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 초감각에 대한 단어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책은 HSP의 특징을 시종일관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HSP들의 감각 처리 기관은 그야말로 스펀지 같아서 주변의 모든 자극을 흡수하려는 습성을 지닙니다. 이 스펀지 같은 기능은 흥미롭게도 영재들의 선천적인 영민함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어서 영재개발센터 창립자인 심리학자 린다 실버만은 연구를 통해 감각 처리 기관의 민감성과 선천적 영민함이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p20
초감정은 타인의 감정이 자신에게 그대로 전이되어 그 감정에 강하게 빠져드는 경향을 말한다. 보통의 경우 다른 사람이 화가 났을 때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는 정도에 그치지만, 초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화가 자신에게 그대로 전이되어 자신도 화가 나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과 반대되게도 이 또한 자폐 아동의 특징이다. 자폐는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상대의 감정을 자신에게 그대로 전이시키기 때문에 감정에 대한 방어가 심한 경우에 가깝다. 심리학자 제프리 버드와 에시 비딩에 따르면, 사람마다 공유되는 감정을 조절하는 자기-타인 스위치가 존재하는데, 자폐인은 타인과 자신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게 어렵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스위치를 완전히 꺼버린다고 주장한다. 스위스 출신의 헨리 마크람도 자폐인들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많이 느껴서 힘든 것이라 지적한다.
적어도 내 아이에 한해서 이 말은 상당 부분 타당하다. 아이는 나의 작은 지적에도 갑작스레 화를 내고 그 감정에 깊이 빠져 있다가, 상황을 누그러뜨려는 나의 농담에 곧바로 웃음을 짓는다. 아이의 감정은 극단적이지만, 극단적이기 때문에 상대의 감정에 빠르게 영향을 받는다.
상대방의 감정에 따라 자신의 기분도 달라지는 감정 전이는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HSP의 경우에는 그 속도와 강도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데 그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짜증을 내고 있는 상황이라면, HSP는 그 부정적 감정이 전이되어 자신도 잔뜩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상태가 되는데요. 이렇게 감정만 전이된 상태에서는 전적으로 자신의 기준에서 ‘별것도 아닌 일로 왜 저래?’, ‘진짜 이해 안 되네’와 같은 주관적 평가, 즉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기 쉬워집니다. p31
마지막 초심미안은 문화와 예술 영역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는 경향을 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주관과 잣대가 강하며 호불호가 분명하다. 이 또한 자폐 아동의 자기 관심사에 대한 과몰입과 연결된다.
HSP의 세 가지 특징이 자폐적 특성과 비슷하다고 해서 HSP가 ASD라고 말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세부적으로 볼 때, 속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겉으로는 무난한 사람으로 보인다던가, 팀으로 활동할 경우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팀 플레이어로 변신한다는 점은 자폐 아동의 특징과 상반된다. 다만 HSP를 가능한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태도를 자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HSP의 특징으로 언급한 초감각, 초감정, 초심미안에 '뛰어넘는다'는 긍정적 의미가 담긴 ‘초超’라는 단어를 쓴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부정적 의도라면 정도가 지나친 ‘과過’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진짜 예민한 사람은 타인이 불편할 수 있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예민함을 드러내지 않고,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고 혼자 해내려고 하다가 결국 번아웃에 빠지고,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나를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내용에도 공감하지만, 내가 이 책을 통해 가장 배우고 싶은 것은 HSP가 가진 특징에 대한 작가의 시선이다. 자폐 아동의 특징도 이렇게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예민하다는(자폐라는) 게 나쁜 게 아니라 좋을 수 있다는 가능성.
한평생 감당해야 할 고통도 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