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김초엽, 김원영
김초엽 작가와 김원영 작가의 칼럼을 모아 재구성한 책이다.
장애를 주제로 두 사람의 글을 교차하여 보여주다, 마지막은 두 사람의 대담으로 마무리된다. 책날개에 작가 소개를 읽다가 멈칫했는데 이들에 대한 마지막 문장 때문이었다. "후천적 청각장애인이다." "휠체어를 탄다."
장애가 한 사람의 정체성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장애 없이는 그 사람을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장애가 미치는 영향이 강력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장애가 개인의 정체성이 아닌 때가 오길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장애가 가진 불편함이 사라져야 한다. 휠체어를 타는 사람이 이동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휠체어를 탄다는 사실은 희미해진다. 보청기 없이는 듣지 못하는 사람이 실시간 문자통역 서비스를 받는다면, 청각장애인이란 무게도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최첨단의 기술, 의학의 획기적인 발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장애인들을 위한 현실적인 아이디어가 필요한 이유다.
제목에 등장한 ‘사이보그’는 기계와 결합한, 인간의 몸을 말한다. 여기에서 기계는 폭넓은 의미로 쓰인다. 걷지 못하는 사람이 휠체어를 사용하는 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보청기를 착용하는 것도 포함된다. 흔히 사이보그라 말할 때 떠올리는 보편적인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다. 최첨단 기능을 가진 기계와 결합한 상태를 사이보그라 할 수도 있지만, 몸에 부착하지 않더라도 특정 기계를 몸의 일부로 사용한다면 이 또한 광의의 의미에서 사이보그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장애인 사이보그'. 여기에서 문제는 발전하는 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장애인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휠체어의 가격이 얼마인지 생각해 본 적 없다. 수동 휠체어부터 전동 휠체어, 몸을 직립으로 일으켜주는 스탠딩 기능을 포함한 다기능 전동 휠체어까지, 그 기능에 따라 가격이 몇 백만 원에 달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어디 휠체어뿐인가? 보청기도 비슷하다. 귓속형 디지털 보청기는 하나에 3백만 원, 양쪽 귀는 당연히 그 두 배다. 인공 와우를 위한 비보험 수술의 경우, 한쪽 귀에 2천만 원 이상을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만약, 기술이 보편화되어 비용의 압박이 사라진다면 장애는 종식될 수 있을까? 책을 읽다 보면 이에 대한 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장애는 사라지지 않는다.” 제대로 된 답을 위해서는 질문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모든 장애인이 이 같은 기술을 흔쾌히 받아들일까? 휠체어를 타는 뇌병변장애인이자 일본의 한 인권활동가는 장애를 고치는 약이 나와도 먹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를 치료한다는 발상 자체가 장애를 교정해야 할 ‘비정상’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치료를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말하는 것이 너무 이상적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치료할 방법이 있으면 당연히 치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교정할 기술이 있다면 당연히 그 기술을 선택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현실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모든 수술에는 부작용과 위험성이 있고, 신체를 교정하는 일이나 기계 장치와 연결되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중략)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수술 대신 안경을, 임플란트 치아 대신 보철을 선택한다. 치료는 선택지가 될 수는 있어도 절대적이고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완벽한 기술이 없는 현실에서 ‘완벽한 치료법이 나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설령 먼 미래에 좋은 신경보철 다리가 개발되더라도 경사로를 선택하는 이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p84
장애가 있는 사람이 치료를 거부하는 상황은 선뜻 상상하기 힘들다. 치료가 '개선'의 의미를 담긴 부정적 의미라 해도, 치료할 수 있는데 치료를 선택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만약, 비장애인이 자신의 팔을 자르고 만능 로봇 팔을 부착할 수 있을 때, 이를 선택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 생각해 본다면 장애인의 치료 거부도 심정적으로 이해가 간다. 이 사례가 극단적이란 생각이 든다면, 시력교정수술을 선택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떠올리면 된다. 현재의 상태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으니, 획기적 변화가 아닌 익숙한 유지를 선택한다는 의미다. (물론 변화를 대체할 의료적, 사회적, 제도적 지원은 필요하다) 설령 모든 장애인이 치료를 선택한다 할지라도, 치료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작가의 말처럼 완벽한 기술은 불가능하고 완벽한 치료도 허상에 불과하니까.
책을 쓴 두 작가는 가시성 장애를 가진 당사자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성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어떨까? 이를테면 자폐 스펙트럼과 같은 신경발달장애의 경우, 유전자 편집 기술이 발달한다 해도 자연 발생적 유전자 변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결국 완전한 치료는 불가능하고 이런 현실에서 치료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필요한 것은 장애가 있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더욱이 신경발달장애 당사자들은 신경다양성 운동을 통해 자신을 개선해야 할 존재가 아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라 주장한다.
제목은 ‘사이보그가 되다’지만, 책을 읽으며 ‘사이보그가 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는 세상’을 그려 보았다. 필요에 의해 사이보그가 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이보그가 되지 않더라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장애가 정체성으로 기능하지 않는 세상, 장애가 있든 없든 개인이 가진 압도적인 고유성이 중요한 세상 말이다.
흔히 사람들은 장애를 치료할 과학기술과
의학의 ‘위대한’ 발전에 기대를 걸지만,
그렇게 멀리 가지 않더라도 장애인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선택지들이 있다. p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