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ten by 게일 허니먼
소설의 주인공은 어렸을 적 엄마에게 학대받고 불의의 사고를 겪은 뒤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자란 엘리너다.
주인공에 대한 설명만 읽고 바로 책을 선택했다. 한마디로 외톨이 괴짜. 이제 서른이 된 엘리너는 사회복지과 보호대상으로서 배정받은 아파트에 살며 그래픽디자인회사에서 회계업무를 보고 있다. 매일 똑같은 옷차림에 반복되는 일상을 즐기는 엘리너는 평일에는 출근해 혼자 점심을 먹고 신문에 실린 단어 맞추기 퍼즐을 푼다. 금요일에는 피자와 와인, 보드카를 사서 주말 내내 집에서 술에 반쯤 취한 듯 시간을 보낸다.
엘리너가 자폐스펙트럼이라는 말은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몇몇 장면을 통해 그녀가 자폐스펙트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책은 엘리너의 성격적 특징을 암울하고도 충격적이었던 개인사에서 찾지만, 시선을 잘 마주치지 않고 신체 접촉을 싫어하며 융통성도 없는 데다가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는 과정에서 핀트가 어긋나는 점은 개인이 겪은 사건만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난생처음 네일 케어를 받은 뒤 ‘다섯 번 매니큐어를 하면 여섯 번째는 공짜’라는 말에 “집에서도 똑같이, 더 잘할 수 있어요. 그것도 돈 안 들이고도”라고 말하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단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폐스펙트럼의 특징을 드러내는 상황도 여럿이다.
“지금 누구 만나는 사람 있어요?” 그가 물었다.
“네.” 내가 말했다.
그가 더 기대하는 표정을 지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그는 더 자세한 대답을 요구하는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천천히, 분명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은 당신을 만나고 있죠, 레이먼드. 바로 내 앞에 앉아 있잖아요.”
그가 콧소리와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잘 알잖아요, 엘리너.” 내가 몰랐다는 게 분명해졌다.
“남자친구 있어요?” 그가 인내심을 보이며 말했다. p236
이 같은 상황은 재미있다. 엘리너 또한 귀엽다고 느꼈다. 루틴을 따르고 단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감각적으로 예민한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엘리너와 같은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변화를 강요하지 않고 때에 따라 말속에 숨은 의미를 알려주며 필요한 경우 환경에 대한 배려를 해주면 된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이럴 때는 이렇게 행동하는 게 좋다고 명확하게 설명해 주면 해결된다. 레이먼드가 엘리너에게 그랬듯 말이다.
“안녕, 엘리너!” 그가 말했고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다. 손에 달그락거리는 쇼핑백과 값싼 카네이션 한 다발을 쥐고 있었다. 로라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하지 않았던가. 어쩌자고 그녀의 정중한 요구를 무시한 거지?
“레이먼드, 초대받은 시간은 일곱 시였어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여섯 시 오십 분에 만나기로 했고, 당신이 늦게 온 바람에 지금 용서가 안 될 만큼 늦었어요. 그건 우리를 초대한 사람에게 매우 무례한 일이에요!” 나는 그를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가 웃었는데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진정해요, 엘리너.” 레이먼드가 말했다.
나는 정말 진심이었는데, 진정하라니!
“파티에 시간 맞춰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십오 분 늦는 것보다 그게 더 무례해요. 내 말 믿어요.” p202
엘리너와 레이먼드는 직장 동료로 알게 되었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성격을 가졌다. 그런데도 길가에 쓰러진 할아버지 새미를 돕기 위해 구급차를 부르고, 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새미에게 말을 걸고 그의 손을 잡아줄 만큼 두 사람은 인간적이었다. 엘리너는 수줍어하면서도 직설적이고 엉뚱한 행동을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가진 여러 특징 중 하나일 뿐이다. 레이먼드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을 하는 엘리너를 무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둘이 함께 간 바에서 기어이 맥주 값 3파운드 50펜스를 요구하는 엘리너에게 레이먼드는 4파운드를 건네며 거스름돈은 가지라고 얘기한다. 이후 다른 카페에서 레이먼드는 엘리너에게 차와 스콘을 기꺼이 대접한다.
엘리너는 수요일마다 엄마의 전화를 받으며 그녀에게 자신의 일과를 보고하기도 한다. 불편하고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전화지만 엄마와의 통화는 꾸준하게 이어진다. 엘리너가 엄마에게서 벗어나기로 결심한 날, 마지막 통화를 하는 장면에서 혹시 엄마가 실재하지 않은 인물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허깨비에 지나지 않았다. 엄마에게 학대당했던 엘리너와 그녀의 동생 메리앤, 고의로 집에 불을 지른 엄마. 엄마와 메리앤은 화재로 목숨을 잃었지만 비극적인 사건 자체를 기억에서 지웠던 엘리너는 실재하지 않는 엄마의 그림자에 갇혀 살아갔던 것이다. 여기서 레이먼드의 대처가 인상적이다. 이미 고인이 된 엄마와 전화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레이먼드는 엘리너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엘리너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다만 기다릴 뿐이다.
엘리너는 자살 기도 후 우울증이라는 진단을 받고 심리상담을 받으라는 레이먼드의 조언에 따라 심리상담을 시작한다. 엘리너는 우울증을 동반한 조현병 증상을 겪는 것으로도 볼 수 있지만(오래전 죽은 엄마와 주기적으로 전화 통화를 하는 것과 처음 본 뮤지션을 자신의 반려자로 여겨 그와 사랑에 빠질 계획을 세우는 것 등) 소설에서는 진단에 대한 어떤 언급도 하지 않는다. 자폐스펙트럼도 비슷하다. 그녀가 자폐스펙트럼인가 아닌가는 중요한 질문이 아니다. 엘리너가 여러 사건 속에서 생각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고 점차 변해가는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엘리너 올리펀트는 완전 괜찮아. 사실 엘리너의 삶은 괜찮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엘리너라는 사람은 완전 괜찮다. 레이먼드와 새미를 통해 관계를 맺으며 엘리너는 성장해 간다. 그렇다고 엘리너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엘리너는 여전히 엉뚱한 행동을 하고 속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며 때때로 까다롭게 구는 사람이지만, 이와 동시에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현실 버전을 본 듯한 느낌이다. (실제로 고기능 자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우영우처럼 말하지 않는다. 아이의 경우 어렸을 때에는 억양이 단조로운 면이 있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그런 말투를 보이지 않는다. 자폐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평범하다.)
ps. 리즈 위더스픈이 소설의 판권을 구입했고 곧 영화화될 예정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