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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선생 Jan 01. 2021

신입 강사의 시작

“무서운 십 대와 잘 싸우고 오길 기도해주셔!”     


학원 강사로 처음 시작하던 날. 내 SNS에 내가 남겼던 말이다. 중학교 문제집 사진과 함께...

‘무서운 십 대’라는 말이 지금은 너무도 우습지만, 그때 나는 첫 수업을 앞두고 설렘과 걱정이 가득했었다. 첫 수업을 앞두고 ‘무서운 십 대’라는 표현을 했던 것은 전임자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앞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아이들의 통솔이 어려워서 스스로 학원을 떠나시는 상황이었다. 조금 드세다고 할 수도 있고 흔한 말로 ‘문제아’에 가까운 아이들이 있는 반으로 인해서 수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감당하기 어려운 아이들이 모여있는 반이 있었다. 내가 만나야 할 바로 그 ‘무서운 십 대’들은 중학생이었다. 그 반 아이들은 학교 성적은 하위권이었고, 교사의 말을 쉽게 잘 듣는 타입의 아이들도 아니었다.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시끄럽고 제멋대로에 버릇이 없는 아이들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마음가짐은 ‘전투’에 나가는 마음 가짐과 같았다. 애들이 못돼 봐야 애들이지라는 순진한 생각 따위 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위 ‘불량’ 학생이라는 편견이 있는 편도 아니었다. 


속된 말로 ‘선빵’이 중요하다는 데 아이들과의 관계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외모적으로 봤을 때 나는 그렇게 무서워 보이는 사람은 아니다. 키도 작은 편이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모범생의 전형적인 이미지 같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어 오히려 좀 만만해 보이는 인상이다. 그 당시에 여전히 여기저기서 신분증 요구를 받았었는데, 그건 어리게 예뻐 보인다가 아니라 그냥 진짜 애처럼 보여서였다. 그래서 만만해 보이지 않기 위한 내 전략은 무채색의 의상이었다. 안경부터 의상까지 소위 ‘사감 선생님’ 스타일이었다. 목소리가 좀 큰 편이고 너무 가늘지 않은 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말하는 것에 걱정은 없었다. 단지 표정관리에 신경을 썼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시작하는 선생이 아니라 무심한 얼굴로 교실로 들어섰었다. 당연히 아이들은 새로 온 선생의 간을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교실이 마찬가지였지만, 내가 그 교실에 새로 들어오는 입장이 될 때 아이들은 경계하고 선생의 간을 본다. 이 사람이 실력이 있는지, 만만한지, 무서운지 등등 말이다. 특히 그렇게 불량스러움으로 찍힌 아이들은 더더욱 심하다. 당시 아이들의 마음속이야 어땠는지 모르지만, 웃지 않고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리는 어쩌면 다소 차가워 보이는 선생으로 나는 시작했다. 첫인상이 무서워 보였으면 제일 좋았겠지만, 차갑다고 느껴도 괜찮았다. 적어도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다가 되었으면 했다. 


그 아이들과의 시작은 하루하루가 정말 전쟁터였다. 언성을 높여서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거나, 문제가 있는 학생을 따로 교무실로 불러내어 혼을 내는 일이 거의 매일이었다. 10분 이상 조용히 집중하기 어렵고, 내가 하는 말마다 딴지를 걸고, 틈만 나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문제를 풀라고 하면 서로 베끼기 바쁜 아이들.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정말이지 진이 빠지고는 했다. 와중에 반 안에서 약한 아이가 먹잇감이 되지 않도록 살펴야 했고, 학원이니 아이들 성적도 올려야 했다. 나는 매일 같이 아이들에게 화를 내야 했고, 다그쳐야 했고, 소리를 질러야 했다. 지금도 내 손등에는 그때 그 전투에서 얻은 훈장이 남아 있는데, 핸드폰을 압수하려다가 아이가 들고 있던 샤프에 베인 상처다. 그 얇은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는지 여전히 내 손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선생의 손에 상처를 내는 아이라니 하며 지금 경악을 했을 어른들도 있겠지만, 그만큼 핸드폰에 집착하는 아이들의 모습만 보시면 된다. 고의로 내 손을 그었던 것은 아니었기에 당사자도 엄청 놀랐던 사건이었다. 그런 매일의 전투를 신입 강사인 내가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이었던 것은 나는 그 아이들 하나하나가 학창 시절 내가 알던 얼굴들과 겹쳐 보였다는 것이다. 문제 행동이 반복되는 아이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른들이 그것을 몰라서 문제이지. 아이들의 반항이 계속되는 것은 어른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이기에 그 와중에 아이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었다. 아이들에게 욕을 하지 않도록 지도하면서 내가 욕을 하면 안 되기에 여러 애칭을 사용했었고, 수업 외적으로 아이들의 이야기도 많이 듣고 그 아이들 수준에서 같이 이야기도 했었다. 서로의 문제를 베껴서 풀지 못하도록 일부러 시험지를 A, B... 심지어 C버전까지 만들어서 풀리기도 했었다. 너희들이 아무리 날고뛰어 내 머리 위로 올라가려고 해도 선생님은 결코 너희들에게 머리를 내어 줄 리가 없다는 것을 정말이지 온몸으로 피력했던 것 같다. 


그때의 내가 온전하게 좋은 선생만은 되지 못했다. 문제가 있는 반의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 이미 어느 정도 감정상태가 좋지 못했고, 톤도 한껏 올라가 있었다. 때문에 그다음 반에서 나도 모르게 과하게 반응하는 때가 있었다. 어느 날 “걔들한테 화난걸 왜 우리한테 풀어요.”라고 항의하는 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 학생이 그 교실에서 했던 말은 지금도 잊히지가 않는다. 때문에 지금도 그 학생은 잊지 못한다. 어찌나 미안했던지... 선생도 사람이기에 감정적일 수 있지만, 그 감정을 다른 교실까지 끌고 온 것은 선생답지 못했다. 그 뒤로는 일부러 교무실에서 한숨을 반드시 고르고 넘어갔으며 말투에 있어서 신경을 썼었다. 그렇게 나라는 선생이 컸다.


문제의 학급은 내가 그 학원을 그만두게 될 때까지 제대로 잘 운영되었다. 그 아이들은 여전히 말썽이 많았고, 새로 선생님이 올 때마다 통제 불가가 되어 날뛰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이들을 다독이고 자리를 잡게 만드는 사람이 결국엔 내가 되었다. 그렇다고 마냥 내 수업을 얌전히 들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앞서 말한 내 손에 상처를 남긴 사건이 일어났던 때가 지도한 지 1년은 지났을 때였으니, 문제 행동이 완전히 고쳐진 것은 아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상처를 낸 사건에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나도 장난삼아 저 녀석이 선생님 상처 입혔다고 다른 학생에게 일렀고, 아이는 바로 제 친구에게 미친 거 아니냐며 응징을 했었다. 그리고 결국 그 학원을 관두게 되어 마지막 수업을 하고 났을 때, 그 아이에게 도착했던 메시지. ‘국쌤 쌤덕에 국어 점수만이올랏는대 아쉬어요 기억할께요!’ 당최 내가 일 년간 녀석에게 뭘 가르친 건가 싶은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최소한 아이의 마음에 믿을 만한 어른은 되었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시작이 거친(?) 아이들을 만났던 것을 지금의 나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근무하는 곳에서 아이들은 나를 우리 학원에서 무서운 선생님 랭킹에 올린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날 미워하냐면 또 그건 아니다. 무섭다고 하면서 내 뒤에 와서 매달리는 아이들이다. 그때 그 문제 많던 아이들은 그 뒤로도 따로 연락이 와서 몇 번 더 봤었다. 나도 어려서 학원을 다녀 봤지만, 학원 선생님이 보고 싶다고 연락을 해오는 일이 흔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건 내 자랑이다. 그 뒤로 강사 생활을 하면서 그때만큼 전쟁을 벌이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내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마냥 귀엽기만 하다. 제 아무리 떠들고 말썽을 부려도 다 귀엽기만 하다. 지금은 감히 내 수업 시간에 베끼기를 시도조차 못 하지만, 몇 년 전에도 A, B, C버전으로 시험지를 주는 선생은 나뿐이라며 혀를 내두르는 애들이 있었다. 나보다 조금 늦게 강단에 서게 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도 시작에 말썽이 많은 반을 맡았었다. 초등학교에서는 5학년이 무적인데, 그 5학년 중에서도 학교에서 소문난 녀석들이 모인 반을 맡아서 일 년을 정말 고생을 했었다. 하지만 그다음 해에 그 친구와 나는 그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 아이들 덕분에 아주 단단해졌다고 말이다. 이후로 그 친구도 학교에서 깐깐하고 엄하지만 좋은 선생님이 되었다. 시작이 험난한 것은 어쩌면 ‘행운’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 시작을 잘 이겨내면 더 단단해질 수 있으니 ‘성장’의 기회가 되니 말이다.


올해 들어서 나는 또 다른 ‘시작’을 맞이했다. 교무 실장이 되어서 이제 강의 외적으로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늘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교무 실장이 되어 처음으로 회의를 진행하고 온 날이다. 며칠 전부터 긴장이 되어서 먼저 관리직을 했던 친구에게 조언도 구하고, 주변에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다 연락해서 이 걱정을 토로했다. 그리고 오늘 출근할 때, 처음 강의를 하던 그날처럼 옷차림부터 시작해서 표정과 말투까지 준비했다. 다행히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다른 ‘시작’이라면 지금 이렇게 내 강사 생활을 돌아보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모든 ‘시작’은 걱정이 많다. 아직 해보지 않았으니 두렵고 무섭다. 하지만 동시에 설렌다. 첫 수업을 앞두었던 그때도 걱정이 많기는 했지만, 설렘이 걱정보다는 컸다. 걱정이 더 컸다면 아마 그때 나는 그 학원에서 근무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말썽이 많은 아이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마주하고 수업을 한다는 그 설렘이 있었기에 그 교실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가 무언가를 ‘시작’을 했다면 그것은 그 일이 주는 ‘설렘’이 있기 때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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