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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북선생 Dec 01. 2021

사랑받지 못하는 선생


5~6년 차쯤의 일이었다. 초짜 티는 살짝 벗어난 아직은 어린 선생에 속하던 시기. 우리 학원엔 새로운 수학 선생님이 오셨었다. 나보다 연차도 나이도 조금씩 더 많으신 분이었고, 결혼을 하고 아기도 있으셔서 여러모로 나보다는 인생 선배인 분이었다. (편의상 '수쌤'이라고 칭하겠다.)


출근을 하신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무렵. 출근시간에 아슬하게 도착하신 수쌤을 보고 나는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연차가 몇 년 안되기는 했어도 어느 학원에서도 보지 못한 스타일의 선생님이었기 때문이었다. 방금 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치고 나온 사람처럼 긴 생머리가 물에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집에서 저녁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사람처럼 편한 옷차림이었다.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급하게 왔다는 말씀이 뒤이어졌다. 당시엔 너무 놀라서 당시 몇 없던 갓난아기가 있는 친구에게 상황을 물어보기까지 했었다. 친구의 답은 아기 때문에 정말 정신이 없었나 보다고 했지만, 다른 A 선생님은 수쌤의 모습에 혀를 차며 "오전 출근도 아니고, 오후 4시 출근인데 너무 한 거지."라는 말씀을 하셨다. 수쌤은 그 후로도 종종 너무 편하다 싶은 상태로 출근하시는 일이 종종 있었다. 사람을 외적인 것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워낙 그런 선생님을 본 적은 없었어서 나에겐 여러모로 충격이었다. 수쌤이 근무하신 지 한 달 여가 되자, 몇몇 아이들은 수쌤을 좋아하지 않는 티를 냈다. 몇몇 아이들은 저희들끼리 수쌤의 외모를 탓하기도 했다. 수쌤은 주에 절반은 여전히 너무 편한 차림이셨다. 캐주얼이 문제인 것도 아니었고, 의상의 색상이 어두운 문제도 아니었다. 정말 표현할 방법이 딱 늦은 시각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러 잠깐 나온 사람 같은 복장. 정말이지 그보다 더 정확한 묘사를 할 수가 없다. 


그전에 근무했던 학원의 원장님은 밝은 색상의 셔츠와 청치마를 유니폼처럼 입고 다니는 분이었다. 고등부 영어 선생님이셨는데, 회식자리에서 원장님의 나이를 듣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대학생 아들이 둘이나 있다고 하신 말에는 정말 기절할 뻔했었다. 그 원장님은 늘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는데, 수업 적인 면이야 당연하겠지만 복도에서 아이들과 장난치시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대학생 선배쯤으로 보였다.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알아요? 이 치마를 계속 유지해서 입는 거 생각보다 엄청 힘들다 쌤."


웃으시면서 그 말씀을 하시던 원장님의 말 뜻이 뒤늦게나마 이해가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아이들의 시각에 자신을 맞춰주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진짜 프로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학생일 때도 비슷했다. 일 년 내내 단벌신사처럼 다니는 선생님을 아이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지저분해 보이는 차림이면 더더욱 싫어했다. 여학생들에게 더 인기가 많았던 여자 선생님이 계셨었는데, 그 인기 요인 중에 하나가 선생님의 패션이었다. 그 선생님이 매 수업마다 다른 옷을 입고 와 옷이 삼백 벌인 거 아니냐는 의심을 할 정도였는데, 담임반이었던 아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두세 번 입고 온 옷들도 있다고 했다. 그만큼 애들은 선생님의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그걸 좋아했다. 예나 지금이나 애들은 선생님에게 관심이 많다. 학원에 일 년 내내 비슷한 스타일의 정장을 입고 다니는 남자 선생님이 계셨는데, 어느 날 고등부 여학생이 선생님을 보더니 조끼를 새로 샀냐고 물었다. 늘 입으시던 스타일로 입고 오셔서 정작 동료들은 아무도 몰랐는데, 여학생은 바로 선생님의 새 조끼를 알아봤다. 선생님이 오늘 무슨 옷을 입었는지가 왜 아이들의 관심사인지는 지금도 미궁이지만, 아이들은 선생님의 차림에 정말이지 관심이 많다. 예쁜 옷을 입고 온 날 아이들의 반응은 최고다. 여담이지만 그래서 옷 욕심을 멈추질 못하겠다.


다시 수쌤 이야기로 돌아가, 교무실에서 조금씩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정도가 되었을 무렵이었다. 아이들 중에 선생님에게 유독 치대고 붙는 것을 좋아하는 애들도 있었는데, 그런 아이들의 경우 교무실까지 잘 쫓아다녔다. 교무실에 학생 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쫄쫄 선생님 뒤를 따라서 오고 장난도 잘 쳤다. 쉬는 시간마다 교무실에 오는 단골손님 같은 아이도 있었는데, 나는 그런 아이들이랑 잘 노는 편이었다. (워낙 애들과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기도 한다.) 그날도 나는 그렇게 아이들과 잘 놀았고, 아이들이 교무실에 나가고 나서 "애들 예쁘지 않아요?"라고  말했었다.


"선생님은 애가 없으니까 그렇지. 애 낳으면 내 애랑 달라."


어리고, 미혼에 아이도 없어서 모르는 지점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이들을 사랑하지 못할 이유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쌤은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자신의 아이와 교실에 있는 아이들은 다르므로 예뻐하기 어렵다는 투로 말했다. 전부터 수쌤을 못마땅해하시던 A 선생님은 그걸 좀 기막혀하셨다. A 선생님은 고등학생인 자신의 자녀보다 학생들과 영화를 더 자주 보러 가는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분이실 만큼 아이들과 친밀하셨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도 그쯤부터 수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빼빼로 데이.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아니 전적으로 내게만 결정적이고 수쌤은 전혀 몰랐을 일이다. 중학교 아이들은 빼빼로 데이라고 잔뜩 신이나 있었고, 교무실에 빼빼로를 들고 오는 아이들이 여럿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저 빼빼로만 가져다 안겨줬지만, 한 학생이 빼빼로 상자 뒤에 그려져 있는 편지지에 또박또박 편지를 써줬다. 교무실엔 고등부 여학생 하나가 앉아서 나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자기도 어릴 땐 저랬는데 하면서 선생님들과 농담을 하고, 아이들이 선물한 빼빼로를 같이 나눠 먹고 있었다. 


"쌤, 이거 편지 있는데요? 버려요?"


고등부 여학생 뒤쪽에 쓰레기통이 있었다. 아이가 준 빼빼로 상자 하나를 수쌤이 툭하고 버린 것을 그 여학생이 봤다. 상자 뒤에는 아이가 또박또박 적은 '수학 선생님께'가 쓰여 있었는데 말이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빼빼로 상자에 그려진 편지지라고 해봐야 몇 줄 되지도 않지만, 그래도 그 아이는 그 빈칸을 다 채웠다. 내가 받은 편지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말도 엄청 뻔했을 것이다. '잘 가르쳐 줘서 고맙다. 공부 열심히 하겠다.' 같은 어쩌면 선생님들이 흔하게 받을 매우 상투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 빼빼로 상자는 내 가방에 넣었다. 교무실에 그 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그 교무실 쓰레기통에 넣지 않았다. 고등부 학생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그 빼빼로 상자를 보았다. 자신이 준 것도 아니고, 잘 알지 못하는 중학교 학생의 편지였지만, 수쌤에게 보내는 것이 분명한 편지를 말이다. 


"집 가면 어차피 버려."


아이의 질문에 너무도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수쌤의 대답. 그 순간 교무실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나는 딱히 뭐라 입을 열지 못했고, 고등부 여학생은 놀란 눈으로 수쌤을 봤다. 정작 당사자인 수쌤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의 일을 봤지만 말이다. 수쌤은 우리와 오래 있지 못했다. 아이들이 수쌤을 너무 싫어해서 원장님이 결국 해고 처리했다. 당시 교무 실장님이 몇 번 수쌤과 대화를 나눈 것도 같았지만, 아이들이 선생님을 미워할 때는 답이 없다.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아이들은 선생님을 거부했다. 수쌤이 얼마나 고학력자이고 경력이 얼마나 화려하고 얼마나 대단한 대학에 학생들을 진학시켰다고 한들... 아이들이 사랑하지 않는 선생님이 우리 학원에 남아 있을 자리는 없었다. 수쌤은 아이들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날. 그 빼빼로 상자를 버리던 순간이 바로 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이들을 정말로 존중하고 아꼈다면...


그런 아이들의 앞에서 수업을 하기 위해 오는 수쌤의 복장은 최소한 단정했어야 했다. 화려한 모습은 아니어도 깔끔한 모습으로 섰어야 했다.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 말이다. 자신의 아이와 똑같이 사랑을 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애들을 애정을 가지고 대하는 노력은 했었어야 했다. 아이가 주는 아주 작은 애정 표현들을 그렇게 쉽게 쓰레기통에 던져서는 안 되었다. 자신이 준 선물이 아니라고 해도 그걸 보고 있던 학생은 저 선생님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번에 알았을 것이다. 아이들이 주는 모든 것을 박제해서 보관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내가 겪은 대다수의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준 아주 작은 선물도 절대 학원 쓰레기통에 처박지는 않았다. 


나보다 연차도 많으신 분이었고, 경력이 나름 화려한 분이었으니 아마 이후로 어디서든 수업은 잘하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분은 절대 아이들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선생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는데, 아이들이 사랑할 리가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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