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부들이 임원의 지시를 받고 내려왔어요.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각자 들은 내용을 서로 맞춰보는 일이에요. 윗분의 생각이 어떤지 알아야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자주 의견이 엇갈려요. 같은 내용을 들었어도 해석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까요. 정말이지 윗사람의 생각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그렇지만 다시 올라가서 이런 방향을 말씀하신 거냐고 여쭤볼 수는 없어요. 우리끼리 최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해요. 필기로 부족함을 느낄 때는 녹음을 해오기도 해요. 그래도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알쏭달쏭해요. 방향을 잘못 잡으면 몇 주는 고생해야 할 텐데 걱정이에요. 어차피 일은 실무자인 제가 다 해야 하니까요.
내일 휴가를 가려고 하는데 언제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이에요. 출근하자마자 말씀드리는 건 아닌 것 같아 타이밍을 한 번 놓쳤어요. 왠지 다들 바빠 보여서 더 눈치가 보이네요. 점심을 먹기 전이 나을까요, 아니면 점심시간 직후 한가한 시간이 나을까요. 보고할 거리가 있으면 휴가 얘기를 슬쩍 같이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오늘따라 보고할 것도 없네요. 휴가 얘기만 하기는 좀 어색하거든요.휴가는 전자결재로 처리되지만 사전에 언질 없이 올릴 수는 없어요.더 늦어지면 왜 이렇게 늦게 말하냐고 핀잔을 받을 수 있으니까오늘 안에는 꼭 말해야 해요.무슨 일 있냐고 물어보시면 뭐라고 대답할까요. 정 상황이 안 되면 다음에 가죠 뭐.
잠깐 바람 쐬고 다시 사무실로 올라가다 예기치 않게 엘리베이터 앞에서 임원과 마주쳤어요. 늘 괜찮다고, 얼른 타라고 하시지만 같은 칸에 타기는 부담스러워요. 회사에 들어와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이 있어요.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때 아래층보다 위층을 먼저 갈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에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눈치 없이 제가 가는 층을 먼저 눌러버렸다니까요. 우리 회사 엘리베이터도 다른 엘리베이터랑 똑같은 줄 알았죠. 왜 임원은 항상 높은 층에서 근무하는지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 같아요. 높으신 분들이니 위층에서 근무하는 거겠죠.
한 가지 또 알게 된 사실이 있어요. '당신'이라는 말의 쓰임이에요. 당신은 보통 연인 사이에 쓰는 다정한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상사한테 들으니 어감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그래도 오해는 마세요. 폭언이나 인격모독 같은 건 일절 없으니까요.
오늘은 회식이 있는 날이에요.당일날 회식을 잡는 그런 후진적인 행태는 옛날 얘기예요. 부장님께서 장소를 물색해보라고 하시네요. 블로그를 그대로 출력해서 보여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깔끔하게 정리를 해야겠네요. 고기가 좋을지회가 좋을지 모르겠어요. 판단은 위에서 해 주실 거라 믿고 괜찮아 보이는 식당들의 이름, 위치, 대표 메뉴와 가격을 표로 만들었어요. 회식 장소를 문서로 작성하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하지만, 만들어놓고 보니 왠지 뿌듯하네요. 이 정도면 됐다 싶어 팀장님께도 한 번 보여드리고, 부장님께 보고를 드려요. 부장님께서 잠깐 고민하시더니 그냥 자기가 아는 데로 가자시네요. 헛수고를 했다는 생각보다는 안도감이 먼저 들어요. 제가 추천한 곳을 갔다가 맛이 없으면큰일이거든요. 오늘은 회사 돈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겠네요. 일찍 퇴근도 할 수 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