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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디얼리스트 Jul 10. 2020

자신 있게 떨린다고 말하고 싶다.

남들 앞에서 말하기가 무서워도

발표를 할 일이 생겼다.

주제는 우리 회사에서 진행하는 사업 소개다.

기업 관계자분들이 와서 듣는다고 했다.

어려운 내용은 아니지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까짓 거, 하면 되지.'


발표할 PPT 장표를 출력해서 다시 한번 내용을 숙지하고, 덧붙여 이야기할 부분을 메모해 둔다. 분위기 전환용 유머도 포함해서.


시뮬레이션을 해본다.

시작은 무슨 말로 할지, 챕터가 바뀔 때는 어떤 방식으로 할지, 마무리는 어떻게 할지...

사람들 앞에 서있는 나를 상상하며 연습한다.


발표 당일이 됐다.

연습보다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다.

잘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자신감이 바로 키포인트가 아니던가.

자꾸만 차오르는 긴장 대신 여유를 애써 챙겨본다.


미리 현장에 도착했다.

단상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부담스럽다.

참가자는 10명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여느 강의장이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다.


드디어 발표를 할 시간이다.

평소보다 높은 톤으로 인사를 해보지만 어쩐지 어색하다.

마이크를 왼손에 쥐어야 할지 오른손에 쥐어야 할지조차 난감하다.

목소리는 떨리고, 몸은 점점 굳어진다.

본의 아니게 횡설수설하게 된다.


처음부터 이상하리만치 꼬이기 시작했다.

시선은 화면과 사람들을 번갈아 향하지 못하고 헤매기를 반복한다.

내가 따로 출력해 온 장표 따윈 무용지물이었다.


어느덧 나는 화면의 글씨만을 읊조리는 가운데 긴장한 티를 안 내기 위해 분투하는 애처로운 발표를 이어가고 있었다.

뒤편에 띄워진 커다란 PPT 화면이 무색하기만 하다.


발표 하나 매끄럽게 못하는 내가 한심하고,

몇몇은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져 당황스럽,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한테 집중조차 하고 있지 않은데도 떨고 있는 상황 자체에 화가 나기도 했다.


이후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이따금씩 순조롭게 진행이 된다 싶어도 한숨 돌릴 여력은 없었다.


어영부영 발표를 마쳤다.

애초에 배정된 시간은 40분이었지만 여기에 턱없이 못 미치는 20분여 만에 종료됐고, 나는 밀려오는 자괴감을 견디지 못해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해버렸다.




나는 발표 울렁증이 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를 할라치면 가슴부터 뛰기 시작한다.

대체  왜 이렇게 긴장을 하는 걸까.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해서, 소심한 성격 때문에, 능력 이상으로 잘하고 싶어서, 연습이 덜 돼 있어서, 이 모든 게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분석을 하다 말고 생각한다. 그게 무슨 소용이랴. 이유를 알아내기도 어렵겠거니와 안다고 해도 앞으로가 중요한 것을.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누구는 떨지도 않고 넉살 좋게 말도 잘하던데.

남들 앞에서 잘 긴장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사람들의 인터뷰를 찾아봤다.

심호흡을 하거나 약을 먹는다는 일반적인 사례부터

시작하기 전에 마음속으로 욕을 한다든가, 앞에 있는 사람들을 고구마라고 생각한다는 발상도 참신했지만, 가장 와 닿는 건 이 말이었다.


"저도 많이 떨려요"


이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다손 치더라도 누구나 떨린다는 별 것 아닌 사실은 큰 힘이 됐다.

나 자신보다는 연습 부족을 탓하고 싶어졌다.

내가 남들보다 더 긴장을 하는 사람이라면 더 부딪쳐 봐야 한다.

계속하다 보면 점점 나아지겠지. 원래 잘하던 사람보다는 못 하던 사람이 잘 해내면 더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고 보면 나는 공식적으로 말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앞에 나가서 말하는 자리가 있으면 가급적 피해왔다.

그렇다고 큰 문제가 될 일도 없고, 실제로 별다른 이슈는 없었으니까.


그러다가 마주한 것이 바로 면접시험이었다.

면접은 취업을 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이자 남들 앞에서 말하는 과정이다.

어떤 곳도 면접 없이는 사람을 뽑지 않았기 때문에 좋든 싫든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면접에 젬병이었던 나는 엄청나게 많은 시험을 보게 됐다.

숱한 탈락은 자책으로 이어지고, 자책은 막막함으로, 막막함은 다시 탈락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면접에서 당황한 나머지 식은땀도 흘렸고,

앵무새 같은 답변을 하거나 지나치게 솔직한 모습도 보였고,

면접관이 압박 질문을 할 때면 면접장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처음에는 긴장되고 떨리는 수준이었다가 나중에는 면접이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결국 기나긴 터널 같은 시간을 지나 간신히 통과하기는 했지만, 면접 때문에라도 다시 취업하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변화가 있었다.

수많은 면접을 거치면서 일종의 알량한 자부심이 생긴 것이다.

우습게도 면접 때문에 근심 걱정이 많을 사람들에게 내가 얻은 팁을 공유하고 싶어졌고, 그동안의 사례들을 정리하여 한 편의 글로 완성시키기도 했다.


한동안 잊고 있었다. 계속 시도하면 점점 나아진다는 사실을. 합격할 때까지 계속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끊임없이 도전한 셈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말하기를 무서워하는 것도 별로 해본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까짓 거, 그냥 하면 되지.'


창피하고 곤란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무너지지는 않으리라 다짐한다.

내게 필요한 건 화려한 강펀치가 아니라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 맷집이 아니겠는가.


물론 당장에 어떤 극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다.

아직은 말보다 글이 편할 때도 많다.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가 생겨도 자진해서 나설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다만 다음번에는 떨린다는 말 정도는 자신 있게 하고 싶다.

"전 발표만 하면 너무 긴장됩니다. 그래도 귀엽게 봐주세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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