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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총 Oct 20. 2024

3화 찬영 씨는 왜 항상 찬영 씨야?


건물 앞 야외 주차장으로 하늘색 레이가 들어섰다. 차가 서자마자 벌컥 문이 열리고 찬영이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찬영은 배를 움켜잡고 옆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형순 피디와 선영 작가가 황당한 표정으로 뒤따라 내렸다.


"야, 김찬영! 어디 가?"

"많이 급했나 봐요."


수진은 트렁크에서 서둘러 가방꺼내며 연신 핸드폰을 확인 중이었다.


"피디님, 채준 씨 계속 스튜디오에서 기다리고 계시대요."

"먼저 기분 좀 풀어주고 찍든가 해야겠네."


형순이 한숨 돌리며 수진에게 법인 카드를 건넸다.


"카페 가서 그쪽 스태프들 마실 거 한 잔씩 사 와."

"네."


카드를 받아 든 수진이 카페로 달려갔다. 형순은 입맛이 썼다. 나이 어린 팀원들 앞에서 대학 동창의 골질을 견뎌야 할 게 뻔했다. 하지만 가버리지 않은 게 어디냐. 팀에서도 이번 기획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 판국에 채준의 욕받이 정도야 얼마든 자처할 수 있었다.  


형순은 태생적으로 이 바닥에서 대성할 인물은 못 되었다. 줄과 백이 전부인 방송업계에서 자리 잡기에 그는 스스로 생각해도 사람 다루는 기술이 서툴렀다. 그는 소위 인맥이란 단어를 몹시 혐오했고, 일에 인간관계를 앞세우는 사람은 절대 신뢰하지 않았다. 남들 다 받는 와이로는커녕 관계자들과의 식사 자리조차 기피하는 그였다.  본사로 넘어가기 위한 거듭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늦은 나이까지 이 열악한 외주제작사에 몸 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간 그가 키워낸 조연출들은 하나 같이 사수의 '무능'을 비관하며 그의 밑을 떠났다. 그렇게 묵묵히 자리만 지킨 지 16년, 이제는 떠났던 조연출들이 본사에서 데뷔해 보란 듯이 히트작을 연출해 내는 모습을 지켜만 보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구태여 피디로 밥벌이하고 있는 그가 아직 매스컴이라는 것의 저력을 믿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그는 공신력이 뒷받침된 정보란 누군가의 인생을,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믿어 왔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수모 정도야 견딜 각오가 돼 있었다. 형순과 선영은 함께 지하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문을 열고 들어선 스튜디오는 마케팅 사 대표와 직원, 스탭 들로 분주했다. 두 사람은 주위를 둘러보며 채준을 찾았다. 조명을 옮기는 직원들에게 채준의 위치를 묻자 한 명이 구석에 위치한 대기실을 가리켰다.


채준은 거울 앞에 앉아 메이크업을 수정받고 있었다. 그의 의자 뒤에서 형순과 선영은 죄인들 마냥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열과 성을 다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채준은 혀를 굴려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을 거만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요, 피디님."

"네, 채준 씨."

"저 요즘 한가해 보여요?"

"무슨 말씀! 바쁘신 거 알죠."


채준은 들으란 듯 한숨을 내쉬며 아량 있게 화를 다스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전시했다.


"잘 아시는 분이. 바쁜 사람 불러다 놓고 한 시간을 기다리게 해요?"


그는 말하다 보니 분이 난다는 듯 다 쓴 기름종이를 거울에 대고 흔들며 성을 냈다.


"얼굴에 기름 낀 거 봐, 이거! 메이크업도 다시 하고 있잖아, 지금!"


형순은 언성이 더 높아지기 전에 얼른 다가가 채준의 어깨를  주무르며 달랬다. 채준은 그의 손길을 사양하기는커녕 도리어 더 뭉친 곳을 갖다 대며 안마를 즐겼다.


"진짜 미안해요. 우리 채준 씨가 워낙 중요한 분이라, 준비가 늦어졌지 뭐야. 촬영 후딱 끝내고 갑시다."

"PD님. 이번에 시청률 만회 하셔야죠."


그의 거드름에 형순은 애써 표정을 유지했다. 채준은 자신이 철저하게 갑인 이 상황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형순은 대학 시절 그와 교류가 많진 않았지만 선배들 앞에서 항상 깍듯하고 경우 있던 채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유명세란 사람의 성품을 이다지도 바꿔놓는 것일까. 아니, 성공은 그의 진짜 인격을 드러나게 해 줄 뿐이다. 콘셉트로 가장한 카페 사장의 느끼한 말투가 사실 대학 시절 여자 앞에만 서면 나오던 그의 원래 버릇이었던 것처럼.  


"원래 같았으면 진즉에 갔는데, 우리 선영 작가님 얼굴 봐서 기다린 거야."


채준은 거울로 선영과 눈을 마주치며 한쪽 눈으로 기름지게 싱긋 웃었다. 선영은 호응하며 마주 미소를 보냈다. 그녀의 가면은 형순보다 훨씬 능숙하고 견고했다. 대기실 문이 열렸다. 수진 피디가 양손 가득 커피와 음료를 들고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채준 님! 이거 드세요! 앞에 카페에서 사 왔어요."


수진은 테이블에 짐을 내려놓은 뒤 커피 한 잔을 집어 들고 채준에게 다가가 내밀었다. 채준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만 이리저리 살펴보며 수진이 내민 잔을 무시했다.


"저기요, 작가님."

"네?"

"제가 하루에 커피 몇 잔 마시는지 알아요?  카페 사장이야. 작가가 출연자 콘셉트도 몰라요?"


수진은 당황하며 잔을 거뒀다. 커피를 몇 잔 마시는지 막내 작가가 어찌 알랴. 그가 말한 대로 카페 사장은 그냥 방송 콘셉트 아닌가.


"아… 기다리느라 목마르실까 봐."


무안당한 수진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했다. 형순은 성질을 삼키며 눈빛으로 수진을 위로하고 채준을 다독였다.


"자, 빨리 찍읍시다. 시간도 늦었는데."

"저 이제 30분밖에  없어요."

"30분이면 뒤집어쓰지. 세팅 금방 되니까 바로 시작하죠."


형순은 대기실을 나와 스튜디오를 둘러봤다. 화장실에 간 조연출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 형순은 핸드폰을 꺼내 찬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찬영은 불과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수 차례의 전쟁을 치른 표정이었다. 안주도 없이 깡술만 들이킨 게 되려 장을 헤집어놔 며칠간 묵혀져 있던 놈들을 전부 쏟아내고 있었다. 역시 숙취해소제라도 먹었어야 했다. 배를 움켜쥐고 비틀대며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네, 피디님."

"야, 똥 다 쌌냐? 빨리 장비 내려. 나도 올라갈 테니까."

"네, 금방 챙겨서 내려가겠습니다."


찬영은 전화를 끊고 차로 달려갔다. 트렁크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열리지 않았다. 그는 차 키를 찾아 주머니를 뒤졌다. 키가 없었다. 아무래도 술이 덜 깬 듯했다. 찬영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정신을 붙들고 다시 찬찬히 바지와 웃옷 주머니를 더듬었다. 하지만 정말로 없었다. 안 빼고 꽂아놨나? 생각이 들어 그는 운전석으로 달려갔다. 차창 너머로 핸들 옆에 꽂혀 있는 키가 보였다. 찬영은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운전석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에 키를 꼽아놓은 채로 문이 잠긴 것 같았다. 찬영은 등골이 오싹했다. 불길한 예감을 뒤로하고 뒷문과 조수석 문을 차례로 다 열어 봤지만 전부 잠겨 있었다. 찬영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그때 계단을 뛰어 올라오는 형순의 발소리가 들렸다.


"야, 장비 안 내리고 뭐 해? 30분도 안 남았어!"


형순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조연출의 표정을 본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그의 시선이 애절하게 손잡이를 당기고 있는 찬영의 손으로 옮겨 갔다.


"문 잠겼어? 차 키는?"

"차 안에요…."


싸늘한 적막이 흘렀다.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둘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채준 팀은 짐을 챙기며 스튜디오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쪽에선 수진이 다급하게 보험 회사와 통화 중이었고, 형순은 몸으로 채준을 막아서며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간절하게 애원했다.


"채준 씨, 잠깐만. 딱 10분이면 된다니까."

"우리 피디님, 진짜 사람 너무 피곤하게 한다. 그깟 인터뷰 잠깐 따겠다고 몇 시간을 기다리게 하는 거야?"


형순이 채준의 옷자락을 붙들자 경호 업체 직원이 다가와 그를 제지했다. 그때 통화를 끝낸 수진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뭐래?"


형순이 초조하게 물었다. 수진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직원 분이랑 통화했는데, 빨라도 30분은 걸리신대요. 차가 막혀서.


그 말에 채준은 지체 없이 문으로 나가버렸다. 형순이 막무가내로 쫓아갔지만 이번엔 매니저가 그를 가로막고 섰다.


"피디님, 이미 스케줄 엄청 지체됐어요. 이것도 많이 기다려드린 겁니다. 야, 빨리빨리 챙겨서 나와!"


매니저는 직원들에게 소리치고 최준을 따라 계단 위로 사라졌다. 뒤이어 직원들도 일사불란하게 짐을 챙겨 스튜디오를 빠져나갔다.



드르륵, 쿵 하며 슬라이딩 도어가 닫혔다. 채준의 검은색 밴이 주차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형순 팀은 건물 앞에 서서 그 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선영은 막내 작가에게 다가서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찬영 씨는 왜 항상 찬영 씨인 걸까?"

"…."


수진은 말없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찬영을 곁눈질했다.


"기사님만 좀 더 빨리 오셨어도…"


말 꺼내기가 무섭게, 보험사 긴급출동서비스 차량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형순 일행의 시선이 옮겨갔다. 차에서 출동 기사가 내리더니 다가와 물었다.


"잠금장치 해제 서비스 요청하신 거 맞죠?"

"네, 맞는데요."


찬영이 얼빠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기사는 차에서 주섬주섬 장비를 꺼냈다.


"엄청 빨리 오셨네요?"

"10분 거린데요, 뭘."

"아까 전화로는 30분 걸린다고 하셨는데…."

"늦으면 항의 들어오니까 일부러 넉넉하게 얘기해요, 직원들이."


찬영은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기사만 바라봤다. 형순은 허탈하게 한숨 내쉬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밥이나 먹고 오자…."


형순과 선영, 수진 세 사람은 찬영과 기사를 남겨두고 주차장 옆 골목길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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