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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총 Oct 06. 2024

1화 남자는 앰비션이라며


새벽 늦은 시간,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이맘때쯤이면 해장국집엔 해장을 하려는 사람보다 술에 취하려는 사람이 많은 법이었다. 벽에 걸린 커다란 텔레비전에선 영화 '와일드 카드'가 방영 중이었다. 모니터 맞은편 자리에선 찬영이 벽에 등을 붙인 채 해장국 한 그릇과 쓸쓸히 독대하고 있었다. 목에는 사진과 함께 '조연출 - 김찬영' 이름이 적힌 출입증이 걸려 있었다. 그는 이미 꽤나 취한 얼굴로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연거푸 술잔만 기울였다.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 화면에 '형순 PD님'이라는 이름이 표시됐다. 찬영은 흠칫하더니 마지못해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얼른 물 한 모금을 꼴딱 삼키고 잠시 심호흡하며 정신을 가다듬은 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네, 피디님."


찬영은 혹시라도 혀 꼬인 소리를 낼까 봐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형순 피디의 거칠고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이 시간에 아직 밖이야?"

"네, 잠깐 밥 먹으러 나왔어요."  

"너 또 어디서 술 퍼먹고 있는 거 아니지?"

"아니요, 그럴 리가요. 이제 금방 들어가려고요."

"내일 시간 앞당겨졌으니까 6시까지 장비 다 싣고 준비 끝내 놔. 늦으면 알지?"

"6시요?"


찬영은 고개를 들고 시계를 확인했다. 이미 새벽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집에서 회사까진 어림 잡아 50분. 6시까지 맞추려면 새벽 4시 반에는 일어나야 했다.


"피디님, 제가 집이 좀 멀어서…"

"그러니까 늦지 않게 일찍 일찍 와서 준비하라고! 너 이 촬영 진짜 중요한 거 알지?"

"네, 알죠."

"채준 그 양반 성격도 겁나 까다로운데, 이번에 공들여서 어렵게 섭외한 거야!"


팀의 사활을 건 중요한 촬영이란 사실은 물론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시간까지 혼자 술을 먹고 있던 건 사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왜 하필 그녀는 이 중요한 날을 앞두고 이별 통보를 한단 말인가. 그 생각을 하자 찬영은 스스로가 한층 처량해졌다. 하지만 형순 피디의 잔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너 운전 좀 신경 써. 선영 작가가 우리 차 타면 멀미 난다고 불평하더라. 태워주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뻔뻔하기는."

"네, 피디님. 근데 잠을 충분히 자야 운전을…"

"야, 나 때는 전날 밤에 퇴근도 못하고 아침까지 회사에서 기다렸다 출발했어! 하여튼 이것저것 다 들어주니까 빠져 가지고."


또 시작이다. 그놈의 라떼 타령. 최대한 빨리 통화를 마무리 짓는 것이 최선이었다.


"시간 맞춰 가겠습니다."

"아침에 장비 체크해서 문자로 보고해. 차에 싣기 전에 사진 다 찍어놓고. 접때 드론도 민아 피디가 망가뜨린 건데 우리가 독박 썼잖아! 네가 미리 체크 안 해놔서."

"네, 그런 일은 없도록…"


대답을 끝내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찬영은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로 욕을 중얼거렸다. 그때 문을 열고 들어선 규보가 가게를 둘러보더니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규보는 찬영의 맞은편에 착석하며 테이블에 깔린 빈 술병들을 보고 학을 뗐다.


"혼자 몇 병을 마신 거야?"


찬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궁금하면 병을 세어 보면 될 일 아닌가.


"너 내일 인터뷰 따러 가는 거 아냐? 김포까지 운전해야 된다며?"


규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찬영은 술을 홀짝이며 벽에 걸린 텔레비전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화면에선 행인이 퍽치기 당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영화 속 양아치들이 쇠구슬을 빙빙 돌리더니 중년 여성의 머리를 후려치고 가방에서 돈을 서리했다.


"저 영화 어릴 때 재밌게 봤었는데."

"이번에 너네 팀 시청률 반 토막 나서 형순 피디 엄청 예민하던데. 내일 하나라도 실수하면 그 인간한테 오체분시 당할걸?"


찬영은 규보의 진심 어린 우려를 듣고 있지 않은 듯했다. 그는 갑자기 규보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거 알아? 나 원래 꿈이 영화감독이었어."

"어? 아, 알지."


찬영은 손가락으로 텔레비전 화면을 가리켰다.


"정아랑도 나 단편영화 만들면서 만났잖아. 그땐 진짜 귀여웠는데. 감독님, 감독님 하면서 쫄래쫄래 따라다니고."


규보는 말이 없었다. 뻔한 레퍼토리였다. 여느 커플이 그렇듯 찬영과 정아도 6년 넘게 만나며 이별과 재결합을 반복해 왔던 것이다.


"나보고 그런 게 멋있다고 했거든. 가진 거 암 것도 없어도, 어? 남자는 깡! 야망! 앰비션이라고."

"어휴, 왜 이렇게 취했냐."


규보는 막무가내로 술을 부어 넣는 찬영을 만류했다. 그 바람에 찬영의 턱을 타고 술이 잔뜩 흘렀다. 흐른 술을 아깝다는 듯이 손으로 받아 쪽쪽 빨아먹는 걸 보니 여간 취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라도 도망가지. 규보는 생각했다.


"그만 마셔. 내일 일 안 할 거야?"

"땡전 한 푼 없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근데 왜 그게 그때는 좋고 지금은 싫은 건데!"


찬영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손님들의 시선이 쏠렸다. 규보는 주변 눈치를 보며 그를 다독였다.


"그래, 김정아가 나쁜 년이지. 알았으니까 일단 나가자."


하지만 웬걸, 그의 말에 찬영은 도리어 언성을 높여댔다.


"네가 뭔데 정아한테 나쁜 년이래! 걔가 얼마나 착한지 네가 알아? 여자애가 맨날 밥 사주고 차비 챙겨주고…."


찬영이 급기야 분통을 터뜨리며 울먹이자 보다 못한 가게 주인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내쫓기다시피 가게를 나섰다. 찬영은 규보의 부축을 받으며 서럽게 울었다. 시간이 약이려니. 규보는 말없이 핸드폰 어플로 택시 위치를 확인했다. 2분 만에 도착한 택시 뒷좌석에 찬영을 던져 넣고 기사님 독산동이요, 외치자 차는 순식간에 밤길을 달려 사라졌다.


택시가 갓길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찬영이 비틀비틀 내렸다. 기사와 실랑이가 벌어진 듯했다. 찬영은 차 안에 지폐를 집어던진 후 거칠게 문을 닫았다. 택시는 짜증스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더 거칠게 액셀을 밟아 사라졌다.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던 찬영은 전봇대를 붙들고 토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게워낸 후 걸음을 옮겼다. 그는 차갑게 언 차도를 가로지르며 생각나는 노래를 아무렇게나 흥얼거렸다.


"나는 개똥벌레. 친구가 없네."


찬영은 인적 없는 육교 아래를 지났다. 얼음 위를 조심성 없이 걷는 모습이 위태롭더니, 육교 그림자 아래에서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 바닥에 뒤통수를 찧으며 나자빠진 찬영은 한동안 미동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프다고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한 발짝 늦게 수치심이 밀려왔다. 그는 혹여 누가 봤을까 싶어 주위를 둘러보고 아무도 없단 사실이 확실해지자 얼른 몸을 가눈 뒤 휘적휘적 집으로 향했다.


찬영은 빨래 바구니에 옷을 벗어던진 뒤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기 물을 틀고 거울을 보니 귀 뒤편에서 피가 한줄기 흐르고 있었다.


"어? 뭐야?"


고개 돌려 뒤통수를 비춰보니 상처가 꽤 길게 벌어져 있었다. 빙판길에 넘어지면서 다친 모양이었다. 인생이 왜 이럴까. 찬영은 한숨만 푹 쉬며 만사 귀찮은 듯 샤워기로 머리에 물을 끼얹었다. 피가 씻겨 내리며 물과 섞여 배수구로 흘러 들어갔다. 술기운에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샤워 후 머리를 말리고 보니 수건에 피가 잔뜩 묻어 나왔다.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은 옷에도 군데군데 핏자국이 보였다. 연고라도 바르고 잘까. 하지만 맞설 수 없는 졸음이 엄습했다. 시간은 이미 두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침대에 몸은 던진 찬영은 잔뜩 마신 술에 피로까지 겹쳐 순식간에 잠들었다. 베개 위로 조금씩 피가 번져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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