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전기차... 그딴 것들 외의 충전에 대하여
나는 충전 강박이 있다. 스마트폰 배터리 충전 량이 절반 이하로만 내려가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날 정도다. 배터리 충전 량을 나타내는 신호가 초록색에서 노란색, 빨간색으로 변하는동안 충전기를 꽂을 콘센트가 마땅치 않다면 다른 일을 처리하지 않는 한이 있어도 콘센트부터 확보를 한다. 그렇지 않고선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니 그 일이 우선이다. 여행을 가도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하는 일이 각종 스마트 기기를 꽂을 콘센트를 확보하는 일이다. 침대 머리맡엔 스마트폰 충전기를 두고, 책상에 있는 콘센트에는 타블렛PC와 스마트워치 충전기를 확보한다. 그리고도 콘센트의 여유가 있다면 전자담배를 충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제서야 마음이 평화로와진다.
이리 충전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밝히는 이유는 아내때문이다. 이 여인은 도통 충전에 대한 강박이 없다. 강박은 커녕 충전을 하긴 하는 것인지 늘 그녀의 스마트폰을 보면 배터리 잔량이 빨간색이다. 하도 자주 봐서인지 원래 그녀의 스마트폰 배터리 잔량 표시는 빨간색이었던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배터리 잔량 10% 미만의 스마트폰을 끼고 살면서도 저토록 여유만만인 이를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아, 또 꺼졌네”
책상에 나란히 앉아 PC작업을 하노라면 자주 듣는 아내의 목소리다. 노트북 PC를 쓸 때도 전원 선을 연결해 두지 않고 쓰다보니 자주 배터리가 꺼져 버리는 경우들이 있는 것이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전원을 꽂을 콘센트가 없는 것도 아니고 왜 안 꽂는 것일까.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이 꺼지고 나서야 전원선을 찾아 연결하고 다시 부팅하는 그녀의 모습이 이젠 익숙하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전기자동차를 사고 싶다고 한다. 환경을 생각해서라도 내연기관차는 이제 그만 타야 한다고 강변한다. 차값이 다소 비싸고 디자인이 별로 맘에 들진 않지만 후손들에게 물려줄 초록 지구를 위해 전기차를 사야겠다고 한다. 마시고 있던 음료를 그녀의 얼굴에 뿜을 뻔했다. 온갖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다급한 그녀의 목소리, 어떨 땐 울먹이기도 할 것이다.
“여보. 차가 안 움직여”, “시동이 안 걸려”, “어떡하지? 아, 씨 늦었는데…”
차량이 가득찬 강변북로에 시동이 꺼진 전기차 안에 앉아 울먹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더니 사흘돌이로 보험사의 긴급출동을 부르는 나도 보였다.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충전에 워낙에 관대(?)한 그녀이기에 오롯이 충전에 대한 업보는 내가 떠맡게 되지 않을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침착해야했다.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자기야 환경을 생각하는 자기 마음은 너무 이쁘지만 전기차는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아직은 충전인프라도 마땅치가 않고, 우리 사는 아파트에는 아직 충전기도 갖추어지지 않았잖아. 불편한 점이 많을거야”
차분히 듣던 그녀는 그럼에도 환경을 생각해야 하는게 아니냐며 충전이야 자신의 학교에서 하면 되지 않겠냐며 이리 저리 논리를 펴며 제법 완고한 입장을 보였다. 고집을 부리는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단호했다.
이런 저런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데 처제가 집에 왔다. 장모님이 싸주신 반찬거리를 갖고와선 냉장고에 넣어주고 있었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제공해주신 장모님과 그 어떤 악천후에도 딜러버리를 해주는 배달의 민족성(?) 처제에게 심심한 감사를 전한다. 갑자기 처제의 등장을 기술하는 이유는 처제의 따끔한 한 마디에 전기차 구입 문제가 일단락 됐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충전도 제대로 안 하면서 전기차는 무슨?”
무심한 처제의 한 마디. 한심하다는듯 언니를 빤히 쳐다보며 그녀는 현관문을 나섰다.
어색한 침묵. 아내는 말이 없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자신의 스마트폰을 쳐다보더니
“전기차는 문제는 다시 얘기해. 따져 볼 것이 제법 있구먼”
말나온 김에 생각해보면 아내와 나는 신체 에너지 사용에 대한 스타일 또한 참 다르다. 나는 에너지 사용에 있어 ‘힘의 안배’를 중요시 여긴다. 아무리 중한 일이 있더라도 내가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일부는 남기려는 편이다. 그렇게 남긴 에너지를 더 요긴하게 쓰고 싶어한다. 어떤 일이든 결국에는 마무리가 될 것이고 그 일이 끝났을 때 남아있는 에너지가 없다면 정작 나의 재미 추구를 위해 쓸 에너지가 부족해지기 마련이잖는가. 나는 내 행복을 위해 에너지를 쓸 때까지 내 에너지를 남기며 안배하려 애쓴다. 반면 아내는 완전히 반대다. 무슨 일을 하건 무조건 올인이다. 몸속에 남은 마지막 에너지까지 다 짜내는 것 같다. 학교 수업준비를 할 때도, 학생들의 시험성적을 채점할 때도, 각 종 기획안이나 원고 작업을 할 때도 밤을 꼴딱 샌다. 커피를 몇 잔씩 퍼 마시며 날밤을 하얗게 지새운다. 그렇게 일을 마무리 하고 나서는 완전 방전이 된 것인지 깊은 잠에 빠진다. 에너지를 쓸 일이 있을 때는 마지막 한 톨까지 빡세게 쓴 다음 충전을 할 때는 온전히 충전에만 집중하는 모양새다.
아내와 나는 충전의 모양새도 다른데 나는 충전이라고는 하지만 에너지가 어느 정도는 남아 있으니 두루두루 내 할일을 하며 쉰다. 언뜻 보기에는 산만해 보일 정도다. 그러고보니 초딩시절 통지표에 왜 매번 ‘머리는 좋으나 주위가 산만함’이라고 적혔는지 알 것 같다. 아내는 오직 충전에 집중한다. 밥도 안 먹고 잠을 잔다. 소모한 시간만큼 잠으로 그 시간을 채운다. 일체의 생체활동이 없다. 먹지도 않고 싸지도 않는다. 그러고는 일만 끝나면 변비가 생긴다며 곽곽거린다. 변비약을 털어 넣는 그녀를 볼 때마 나는 그 변비의 원인을 알겠는데 자신은 이유를 모르겠다니 오늘도 참신한 그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볼 뿐이다.
살 부대끼며 사는 부부도 이토록 다르고 이해 안 되는 지점들이 많더라. 하물며 회사에서 학교에서 사회생활하며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오죽할까. 나와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아… 싫다. 얼굴 마주하는 것도 힘들어’ 라고 할 수 있고 다른 누군가는’와~ 이런 사람도 있네. 흥미로운걸?”이라고 반응할 수도 있다. 그렇게 다 다르다.
온통 다른 것 투성이인 우리 부부가 오늘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이유를 생각하다보니 결론이 하나로 모아진다.
‘인정하자’
세상사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전쟁’이라는 단어는 사라지지 않을까. 부부간의 다름을 인정하면 부부싸움이 줄어들 것이고 국가간 민족간 서로 다름을 인정할 수 있다면 ‘분쟁’, ‘반목’, ‘전쟁’이 줄어들 것이다. 부디 서로를 인정하며 평화롭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아내가 자고 있다. 충전이 어느 정도 된 것 같다. 그녀는 적당히 충전이 됐고, 나는 아직 쓸 에너지가 남았으니 그녀에게 제안해 본다.
“여보야~ 노~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