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악명 높은 K-독감에 결국은 걸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아프다 , 진짜 아프다 말만 들었지 걸리고 나니 죽을 것 같습니다.
벨기에로 돌아온 지 5일째 됩니다. 독감이 발병한 지도 5일째입니다. 비행기에서 내리고 나니 갑자기 몸이 으슬으슬하고 머리가 빠개질 것 같은 두통이 찾아왔습니다.
긴 비행에 피곤해서였을까요, 아니면 집에 간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서였을까요. 저희는 저녁비행기로 도착하여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고, 짐은 내일 풀자며 다들 잠자리에 듭니다.
아침이 되었습니다. 침대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 두들겨 맞은 듯, 온몸이 아픕니다. 머리도 아프고 기침도 납니다. 콧물도 숟가락을 얹었습니다. 진통제를 먹으면 대부분 괜찮아지던데, 진통제도 잘 안 듣습니다.
아이들은 하루의 휴식시간을 주고 내일부터 학교에 보내기로 합니다. 그래도 하루는 쉬어야 시차적응을 조금이라도 하고 수업을 듣겠지요.
짐 풀고 정리를 해야 하는데 밥 먹을 힘도 없습니다. 베짱이씨가 볶음밥을 해서 밥 먹으라 합니다. 그래도 죽을 수는 없으니 한 숟갈 떠 봅니다. 모래를 씹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배짱이가 요리를 개떡같이 해서 그런 건지, 내 입맛이 없어 그런 건지요. 아이들을 보니 잘 먹습니다. 제가 진짜 아픈가 봅니다. 원래 먹을 것 앞에서는 하이텐션인데 목구멍으로 뭘 넘기기가 힘듭니다.
한국에서 살쪄서 다이어트하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자동 다이어트네요. 이렇게 살 빼는 건 싫은데 말이죠.
하루종일 침대와 한 몸이 되어 그렇게 하루를 보냅니다.
다음날이 되었는데 나아지기는커녕 머리는 더 빠개질 것 같고 더 아픕니다. 가정의학의 에게 전화를 걸어오후에 약속을 잡습니다. 너무 기침을 많이 해서 갈비뼈가 아픕니다.
아이들은 베짱이가 학교에 데려다주고 오후에는 제가 데리러 가야 하는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력이 없습니다. 결국 시부모님에게 SOS를 칩니다. 아이들을 픽업해서 집에 데려다주시기로 합니다.
저는 그 사이, 의사에게 갑니다. 벨기에는 하우스 닥터라고 해서 작은 병치레나 큰 병으로 2차 의료기관으로 가기 전(하우스 닥터의 소견서 필요)에 이곳에서 지정되어 있는 의사에게 진료를 받습니다.
갔더니 저를 불쌍한 얼굴로 쳐다봅니다. 정말 안색이 이틀사이에 흙빛이 되었거든요. 누가 봐도 아픈 사람입니다. 청진기로 여기저기 소리를 듣더니 폐는 이상이 없고 기침도 가시는데 최대 6주 정도 소요된다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기에는 약이 없는 거 알죠? 그냥 아픈 수밖에요. 일주일 병가 써드릴 테니 집에서 쉬시죠.
라고 합니다. 벨기에에서는 항생제를 정말 웬만하지 않아서는 처방해 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아프고 열도 나는데 그냥 아프라니요... 약 따위는 처방해 주지 않습니다. 별 소득 없이 집에 그냥 옵니다. 소득이라면 회사에 낼 병가허가서랄까요?
뭘 먹으면 속이 울렁거려서 빵 한 조각 먹고 또 앓습니다.
다음날이 됩니다. 베짱이씨는 일을 하러 나가야 해서 아프던 안 아프던 애들을 학교에서 픽업은 제가 해야 합니다. 애들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운전을 해 학교로 갑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지만 그래도 가야지요.
아이들을 마지막 남은 기운까지 짜내 픽업하고 밥을 먹입니다. 그리고 회사에 전화하고 병가서류도 메일로 보내야 하고 할 일이 많습니다. 엄마는 아프면 안 됩니다.
두어 시간 있다가 애들을 태권도에 데려다줘야 해서 다시 쉽니다. 너무 힘듭니다. 벨기에는 학원차 따위는 없습니다. 제가 차로 데려다줘야지요. 그래도 저만 아파 다행입니다. 근데 왜 저만 아픈 건가요? K-독감 바이러스라서 저만 공격한 건가요?
1호와 2호는 각기 다른 시간에 태권도를 하는데, 2호가 먼저 하고, 가서 50분을 기다린 후, 다시 픽업하고 집에 가서 1호를 데리고 다시 태권도장에 갑니다. 그리고 집에 왔더니 죽을 것 같아 같이 태권도하는 동네친구 엄마한테 문자를 보냅니다. 성공입니다. 1호는 그 집 차를 얻어 타고 돌아온다 합니다.
애들이 집에 오면 또 밥을 해먹여야 합니다. 저는 하루종일 빵 한 조각 먹었습니다. 밥 생각이 정말 안 납니다. 그런데 힘도 안 납니다. 대충 먹이고 재웁니다. 시차적응 엄청 빠르네요. 등교시작 이틀째에 학교와 태권도와 음악학교까지 풀 스케줄을 소화하다니. 저도 해열진통제를 때려 넣고 잠이 듭니다.
이제 4일째인데 조금은 나아진 것 같아 빨래를 돌리고 널고 이제야 짐 정리를 합니다. 그런데 이것만 했는데 너무 지칩니다. 어질어질하고 머리가 아파 온도를 재보니 또 열이 납니다. 또 해열진통제를 때려 붓고 드디어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스피드로 순두부찌개를 끓입니다. 아플 때는 뜨끈한 걸 먹어줘야죠. 한국인은 밥심 아니겠습니까?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매트에 몸을 지지고 나서 아이들을 학교에 데리러 갑니다. 아직도 아프고 어지럽지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게 큰 차이입니다.
애들에게는 스테이크를 구워줍니다. 이건 제가 피곤하거나 힘들 때 쓰는 치트키인데요, 스테이크가 모든 요리 중에 제일 쉽지요잉. 소금 쳐서 굽기만 하면 되니까요. 뒷정리를 하고 거실로 왔더니...
아이들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전기매트를 켜놓고 저렇게 곤히 자고 있었습니다. 역시 엄마가 한국사람이라 몸 지지는 것을 잘 알고 있군요. 시차적응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엄마 아프다고 티도 안 내고 잘 해준 1호와 2호가 장하고 고맙습니다.
5일 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오늘은 힘을 내서 밥도 맛있게 하고 집정리도 하고 출근하기 전, 집안일을 좀 마무리해 보려 합니다. 하지만 아직 컨디션이 제대로 다 돌아오지 않아 좀 쉬면서 해보겠습니다. 아직도 기침이 나고 코도 나오거든요. 해열진통제는 어제부로 안 먹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 뉴스에서 독감에 대해 많이 나왔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어마무시합니다. 태어나서 감기로 이렇게 길게, 심하게 아파 본 것은 처음입니다. 여러분들도 부디 독감 조심하시고 건강 조심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