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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도에 낮술하고 몽마르트 언덕에 오르면

한 잔은 정 없다가 부른 참극

by 고추장와플

배부르고 마음 따듯해지는 한식을 먹고, 그래도 프랑스인데 와인은 한잔 해줘야지 하고 와인을 시켰다. 한 잔만 마시면 정이 없으니, 두 잔을 시켰다. 알딸딸 해 질 때 즈음 우리는 몽마르트 언덕의 꼭대기에 올라가려 식당 밖으로 나섰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왜 이렇게 더운 날 낮술을 마셨을까.

후회가 밀려온다.


32도, 쏟아지는 열기, 게다가 오늘의 더위는 평소에 알던 유럽의 건조한 더위가 아니다. 찜통에 있는 것처럼 덥다. 머리는 어질어질하고 얼굴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진다. 몽마르트 꼭대기의 사크레쾨르 성당으로 이어지는 끝도 없는 계단에 정말이지 죽을 맛이다.


이탈리아인의 멋스러움은 이런 날씨에 낮술을 해도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이 더위에 시크한 검은 옷에 검은 선글라스, 긴 검은 머리를 풀어헤친 벨루치언니는 이탈리아 여배우처럼 시크하다. 난 더워 땀이 삐질삐질 나고 있는데, 사진을 부탁하는 벨루치 언니.

멋져브러 벨루치언니

그에 비해 찌는 듯한 더위에 목이라도 시원해 보고자 집안 청소할 때처럼 머리를 올려 집게핀으로 고정한 나. 이런 말이 생각난다.


멋 부리다 쪄 죽는다.


내가 사진을 찍어주니, 벨루치언니가 말한다.


Metti qua, ti scatterò una foto.

거기 서봐, 내가 네 사진 하나 찍어줄게.


사진이고 뭐고 그냥 다 싫고, 그늘에나 가 있었으면 좋겠다. 멋에 진심인 이탈리아인 답게 주문사항이 많다. 머리 좀 풀어보라 한다. 미치겠다.


Non posso, fa caldissimo. No.

못해, 진짜 너무 더워. 싫어.


내 땀에 절은 얼굴을 보더니 벨루치언니는 한 발 양보한다. 그렇게 해서 몽마르트 언덕의 계단에서 찍은 사진은 이 초점 안 맞은 한 장이 전부다. 합성이라도 해야겠다.

누군지는 나만 알아보는 사진

중간에 에어컨이 틀어진 기념품가게가 나왔다. 평소에 기념품가게에는 잘 들어가지도 않는 나인데,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가게에 들어갔다.


솔직히 이런 머그컵이 왜 2만 원(12유로)이나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아까 나에게 오랜만에 본다며 온갖 선물을 한 아름 안겨 준 벨루치 언니에게 나는 가방을 가볍게 하고 오느라 준비한 것이 없어, 언니가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머그컵을 선물한다.

Merde, 한국말로 치면 썅이라 적힌 머그컵을 들고 벨루치언니는 행복해한다. 직역하면 똥이란 뜻이지만, 의역하자면 썅에 가깝다. 이탈리아어로는 Merda라서 뜻을 모를 리가 없는데도 기어코 저걸 골랐다.


Perchè no? È divertente!

왜! 재밌잖아.


라며 웃는 그녀. 언니가 좋다면 그걸로 됐다. 자고로 선물은 받는 사람이 좋아야 하는 거다.


그늘. 그늘이 필요하다. 잠깐의 행복을 준 기념품가게의 에어컨을 뒤로하고 다시 또 계단을 오른다. 언제 끝나, 도대체! 그렇게 비틀비틀, 정신줄은 반쯤 놓고 화가들이 모여있는 광장에 도착했다. 관광객이 바글바글하다. 그리고 덥다. 어딜 봐도 덥다는 생각밖에는 안 든다.


모네, 샤갈, 반고흐 등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활동했던 몽마르트언덕인데 일단 덥고 사람이 많아서 빨리 여길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몽마르트의 맨 꼭대기에는 내가 파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인 사크레쾨르 성당이 있다. 파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은 아마도 시원하겠지?

계단, 또 계단, 계속 계단

!! 여기서 잠깐, 몽마르트에는 사크레쾨르 성당에 올라가는 언덕열차, Funiculaire가 있다. 알고 있었는데, 못 탔다. 더워서 머리마저 돌아가지 않았다. 나이가 좀 드신 분들, 체력에 자신이 없는 분들은 Funiculaire를 타고 올라가자!


파리 지하철 2호선 Anvers역에서 내리면 지하철과 같은 가격 (2.5유로)으로 언덕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복숭아방뎅이가 있는곳이 Pigalle 역ㅡ 파란색으로 표시한 곳이 Anvers 역
Anvers는 내가 사는 도시 Antwerp의 프랑스어 이름이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곳이다 보니 올라가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Pigalle역 (2호선, 12호선) 혹은 Saint-Georges (12호선)에서 내려서 걸어가는 방법이 가장 파리답고, 예쁘고 프랑스다운 빵집과 카페들, 상점들을 구경하며 갈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최단거리 역은 Anvers역 (2호선).



들어가려면 가방검사를 해야 하기에 또 땡볕에서 한참 줄을 섰다. 안에 들어가니 미사가 열리고 있다. 오늘은 앙투안 성인을 기리는 날이라고 한다. 벨루치언니는 이탈리아인이라 아주 경건하다. 알고 보니 언니의 수호성인이라 한다. 두꺼운 대리석벽이 실내온도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해 주니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아무래도 이런 날씨에 계속 밖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무리인 것 같다. 나는 오래 걷는 것도 잘하고, 추운 것도 잘 참는다. 이런 나에게 치명적인 하나가 있었으니, 그것은 더위다. 나는 더위에 취약하다. 로마에 사는 벨루치언니가 놀러 오라고 해도 여름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작년여름 언니가 초대해 갔던 나폴리 남부의 아치아롤리(Acciaroli)라는 곳에 가서 반 죽다 살아왔다. 나름 북부에 해당하는 파리도 이 정도인데 이탈리아 남부에 가면 차원이 다른 더위를 경험할 수 있다. 아침 10시에 이미 36도였다.


검은색 옷과, 치렁치렁하게 내린 긴 머리로 시크함을 유지하고 있던 벨루치언니조차 이제 너무 덥다고 말하고 있다. 오늘은 야외활동이 불가능하다 판단했고 뭔가 대책이 필요하다.


오늘의 교훈: 더운 날에는 낮술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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