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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공동묘지에서 조깅하기

공동묘지에서 배우는 역사와 인문학

by 고추장와플

공동묘지에서 배우는 역사와 인문학


쉬는 날이 아니라 출근하는 날이라지만 아침 5시 반에 눈이 번쩍 떠졌습니다. 일부러 일어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빨리 눈이 떠졌으니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진 않습니다. 밖을 보니 해가 쨍쨍 너무 날씨가 좋아, 조깅을 하러 갑니다. 출근 전 아침조깅이 좋은 이유는 하루 종일 힘이 빠지기는커녕, 에너지가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운동에는 관성이 있어서, 피곤하고 힘이 없어 운동을 안 하면, 더 피곤해지지만 아침 조깅을 하고 하루를 시작하면 하루 종일 활력이 생깁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조깅코스인 공동묘지, 스콘셀 호프 (Schoonselhof)로 조깅을 하러 갑니다. 그러면 출근하기 전에 삶과 죽음을 다 경험할 수 있는 곳에서 숙연하게 되고, 제게 주어진 하루를 감사하게 됩니다. 이 공동묘지는 앤트워프의 호보켄(Hoboken)이라는 구역에 위치한 공동묘지인 입니다. 플랜더스의 개에서 넬로와 파트라슈가 살며 우유를 배달하던, 그 호보켄이 이곳입니다. 84헥타르로 아주 넓은 공원과도 같은 공동묘지인데, 구역마다 유대인구역, 어린이 묘지,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에서 숨진 참전용사 묘지, 영국 참전용사 묘지, 화장 유골을 뿌릴 수 있는 유택동산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울창한 나무들이 저를 반겨줍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아무도 정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큰 곳에 사람이 저 밖에 없네요. 사람 말고 예쁘게 이발소에 다녀온 양들이 저렇게 풀을 뜯고 있습니다. 저 백여 마리의 양들은 이 공동묘지의 직원입니다. 출근을 일찍 해서 저렇게 풀을 뜯고 있는데, 저녁에 집에 갔다가 아침이 되면 출근을 해서 잔디 깎는 기계대신 하루 종일 먹으며 맡겨진 소임을 다합니다. 양들은 양치기에 의해 매일 각각 다른 구역에 배치되어, 잔디 깎는 기계의 소음 없이, 친환경적으로 풀을 관리할 수 있어 앤트워프시에서 양과 양치기를 고용했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이 소음 없이 고요하게 쉬실 수 있어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안으로 더 들어가면, 유명인의 무덤과 일반인의 무덤들이 있습니다. 죽어서까지도 살아있을 때의 이룬 업적에 의해 각기 다른 자리와 조형물, 관리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죽어서 제 묘소를 누군가가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싫고, 죽으면 제가 기억될 최소한만 남겨두고 비석도, 조형물도 놓고 싶지 않아 화장을 하고 수목장을 하고 싶지만요. 제 자식들이 제가 죽고 나면 엄마가 생각날 때 찾아올 나무 하나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일반인의 묘
조각상으로 꾸며진 1823-1892까지 살다 간 전 앤트워프의 시장의 묘

공동묘지를 잘 살펴보면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묘지가 많이 보입니다. 사실, 이곳에는 벨기에의 유력 정치인이었거나, 유명한 학자, 판사, 예술가들의 묘지가 있는데 이들은 프리메이슨이었습니다. 프리메이슨은 Conspiracy Theory에 자주 등장하는 비밀결사그룹이지만, 사실 실제로 존재하고 제가 사는 도시에는 프리메이슨 템플도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일반 시민에게 개방되기도 하고요. 사실 프리메이슨은 종교가 아니라 사회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는 로비단체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19세기 프리메이슨의 리버럴리즘(liberalism)은 벨기에의 정치, 사회, 교육, 예술 등에 크나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유럽의 프리메이슨에 대해서도 한번 써 보고 싶습니다.

제가 사는 도시에 있는 프리메이슨 템플입니다. (출처: 앤트워프매거진)


벨기에의 허균, 헨드릭 콘시안스의 묘

이 곳에서는 벨기에의 허균, 헨드릭 콘시안스(Hendrik Conscience, 1812-1883)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유명한 이유는 처음으로 성공적이고 문학적으로도 인정받는 네덜란드어로 된 소설을 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플랜더스 네덜란드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헨드릭 콘시안스(Hendrik Conscience, 1812-1883)

제가 방금 벨기에의 허균이라고 말씀드렸죠? 허균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을 집필하였습니다. 한글이 창제되고도 한참 동안 사대부나 높으신 분들은 한글을 외면했습니다. 홍길동전은 한글문학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죠. 이곳 플랜더스에서 쓰이는 언어는 네덜란드어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귀족들과 상류층은 네덜란드어를 농부들이나 쓰는 천한 언어라고 멸시를 하였습니다. 모든 국가기관의 중요 문서나 귀한 책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지요. 그러다 본인도 공부를 꽤나 한 헨드릭 콘시안스가 떠억 하고 네덜란드어로 역사소설, 플랜더스의 사자(De Leeuw van Vlaanderen)라는 작품을 써서 큰 성공을 거두어 네덜란드어 소설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플랜더스의 상징은 이 사람의 작품에 등장한 사자입니다.


벨기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는 네덜란드 55%, 프랑스어 44%입니다. 네덜란드어를 쓰는 지역인 플랜더스가 벨기에의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힘을 가지게 되고, 본인들이 쓰던 네덜란드어가 멸시받던 것이 뼈여 사무쳐서인지, 지금도 네덜란드어권에 가면 같은 나라의 공용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영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친절을 피하기 위해 권장되기도 합니다.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사망한 프랑스 군인들의 묘소

다시 또 뛰다 보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독일연맹과 프랑스의 전쟁 당시 이곳에서 숨을 거둔 프랑스 군인들의 묘지가 보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냥 아, 그런가 보다 하시겠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생각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쟁입니다. 처음 들어보셨다고요? 하지만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작품은 많이 들 알고 계시지요?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지역이었던 엘자스(Elzas)지역의 학교에서 독일에 점령당한 프랑스의 학교에서 치러진 마지막 모국어 수업을 담은 작품입니다. La dernière classe가 원제로 프랑스어로 쓰인 작품입니다. 이들도 우리처럼 언어를 뺏기고 독일어로 공부를 해야 했지요.


당시 벨기에는 중립국이었지만, 프랑스의 부상당한 군인들을 인도적, 외교적 차원에서 받아들였고 이 군인들은 고향에 가지 못하고 이곳에 묻히게 됩니다. 포탄과 총알이 흩뿌려져 상처를 입고 죽은 수많은 군인들의 묘소에 지금은 새소리와 바람소리만 들립니다.

그리고 이어 세계 1차 대전과 2차 대전에 참전했던 벨기에 참전용사들의 무덤이 나옵니다. 유럽에 엄청난 상처와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남긴 전쟁들이었지요. 젊은 나이에 나라를 지키다가 피어 보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은 병사들, 그들의 삶이 안타깝습니다. 어떤 묘지에는 그가 누구인지, 왜 이곳에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었는데 테오필 라워르스(Theofiel Lauwers)라는 24세의 젊은 병사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1915년 독일 도르니츠(Dornitz) 포로수용소에 끌려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곳에 매장되었다가 1926년에서야 유해가 고국땅으로 돌아왔다고 적혀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아직도 많은 유럽인들에게는 상처로 남아있습니다. 남편의 할아버지도 수용소에 끌려갔다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고, 다시 돌아왔지만 평생을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드론으로 폭탄을 날리고, 장갑차가 민간인을 쏘아대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날이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화장된 유골들이 보관된 곳이 나옵니다. 지나가다 보니 어느 두 사람의 사진이 눈길을 끕니다. 이역만리 타향땅에서 서양의 이름과 동양의 이름이 섞인 George Gong Sing, Margaret Rose Wong Sing이라는 이름표와 사진이 보입니다. 이 분들의 삶은 어땠을까요? 아마도 저처럼 사연이 있어 외국으로 이주해,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다가 고향에서 아주 먼 이 땅에 묻히신 것이겠지요? 그분들의 사연은 무엇이었을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곳에는 16세기에 지어진 성도 있습니다. 이 사진은 같은 날 찍은 것이 아니라 다른 날 찍은 것이지만, 공동묘지 안에 성도 있다니 신기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복원공사를 기다리고 있어 안이 텅 비어있고, 왠지 스산한 느낌이 듭니다. 1911년 앤트워프시가 이 부지를 매입하기 전에는 어느 귀족가문의 대대로 내려온 영지였을 것이라 추측됩니다.

좀 더 길을 가다 보면 주인과 함께 유골함에 보관된 댕댕이들과 주인들의 묘지가 나옵니다. 댕댕이뿐만 아니라 사랑을 주고 마음을 나눈 반려동물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입니다. 오른쪽 포스터에는 "저는 이곳에 제 주인과 함께 잠들어 있어요."라고 적혀있습니다. 무지개다리를 건너서도 주인과 함께 할 수 있는 반려동물들이 참 행복하겠다 싶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온 곳은, 그냥 보기만 했는데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비석도 없는 아기들의 묘입니다. 벨기에에서는 아기들이나 어린아이들의 무덤은 비석을 세우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찢어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아기가 좋아했던 인형과 장난감을 놓고 왔을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이름만 덩그러니 적힌 나무판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핸드폰 오래 한다고, 게임 많이 한다고 매일 저랑 말싸움을 하는 아이들이지만 이곳에 오니 그냥 건강하게 제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쩌면 잊고사는 지도 모릅니다. 이곳에 오면 늘, 인생은 유한하니 최선을 다해 값지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지금 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누군가가 집 담장을 저렇게 무궁화로 예쁘게 단장해 놓았습니다. 능소화나 등나무로 문과 담을 꾸미는 것은 종종 봤는데, 이렇게 무궁화로 꾸며도 참 아름답다 생각이 들었고 한국인이니 자동으로 무궁화~무궁화 우리나라 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 꽃이라는 노래가 생각이 났습니다. 7km를 뛰고 집에 가서 샤워하고 다시 7km를 자전거를 타고 출근합니다. 퇴근까지 하면 21km이니 오늘의 운동은 이것으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저는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 꽃을 흥얼거리며 출근을 하렵니다. 오늘 하루도 아깝지 않게,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최선을 다해서 오늘 하루를 보내려 합니다.


여러분의 하루도 의미 있는 하루가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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