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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도서관에 갔다

반짝반짝, 초롱초롱

by 고추장와플

광복절입니다. 해외에 사는 한국인으로 오늘은 정말로 기쁜 날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케이팝데몬헌터스, BTS, 스퀴드게임, 한식 등 한국문화는 전 세계에서 가장 활발하게 소비되는 컨텐츠이고 한국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음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제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한국에 관심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남과 북으로 분단된 극동아시아의 분단국가정도로 알려져 있었죠. 물어보는 질문은 단연코 "한국에서 왔다고요? 남한이요, 북한이요?."를 빼놓을 수 없었죠.


저는 저 자신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규정합니다. 디아스포라는 해외에 사는 한국인을 지칭하는 교포와 비슷한 뜻이지만 교포는 사는 곳 혹은 국적에 중점을 두었다면 디아스포라정체성에 중점을 둔 단어입니다. 그래서 고려인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등의 중앙아시아에 거주하지만 아직까지 한국의 문화, 식생활,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기에 디아스포라라는 단어에 아주 모범적으로 부합하는 한국에 뿌리를 둔 디아스포라 집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벨기에에 살고 있고 벨기에에서 사서로 일을 하고 있지만 저는 여전히 한국음식을 먹고, 한국말을 하고, 한국어로 글을 씁니다. 지난번, 웹진에 칼럼을 쓰기 위해 앤트워프 시립도서관에서 사서들을 인터뷰하고, 보답으로 한국어로 구연동화시연을 약속하였습니다. 감사할 일이 있다면 응당 보답을 해야겠지요.

https://theliverary.kr/article?id=1308



제가 고른 책은 런던에 거주하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영국 동화작가 마리사 듈락 <Mariesa Dulak>의 바다로 가는 기차에 호랑이가 탔어요. <원제: There's a Tiger on the Train>입니다. 이 책에는 칙칙폭폭, 꿀꿀, 어흥 등의 다양한 의성어가 있어 아이들이 타 언어로도 재미있게 집중하여 들을 수 있는 동화입니다. 원작은 영어이지만 제가 사는 곳은 네덜란드어를 쓰기 때문에 네덜란드어판으로 다른 자원봉사자와 네덜란드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가며 읽었습니다. 내용은 아빠와 함께 바다에 가는 기차를 탄 아이가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아빠를 보며 상상력을 발휘하여 기차 안에 여러 동물이 나타나고 함께 탄 호랑이가 아빠의 핸드폰을 먹어버린다는 부모에게는 비극적인 이야기, 어린이들에게는 해피엔딩인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유럽에 폭염이 몰아닥친 날입니다. 32도를 육박하지만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은 건물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여름 날씨가 무척 더워졌지만 불과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에어컨이 필요가 없는 날씨였기 때문이지만 최근 들어 이런 더위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유럽에는 여름이 되면 사망자가 나오는 일까지 생길 정도로 기후가 많이 변했습니다.


결혼할 때 맞춘 새색시한복을 이 쪄 죽을 것 같은 날씨에 꺼내 입습니다. 꽃신도 꺼내서 신었습니다. 이왕 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이지요. 17년이나 된 한복이지만 어떻게 들어가기는 하네요. 저고리가 좀 많이 끼기는 하지만 일단 들어갔으니 한숨을 놓았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속치마도 입고 속저고리도 입어야 했지만 에어컨 없는 32도에 그렇게 입으면 동화 구연을 하기도 전에 제가 먼저 쓰러질 것 같아 과감하게 속저고리와 속치마는 생략하고 속바지만 입습니다.

시립도서관에 한복을 입고 나타났더니 이용객들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이 더운 에어컨도 없는 도서관에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어떤 한 아이는 저에게 수줍게 다가와,


"한국사람이에요? 저 진짜 한국 좋아하는데.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도 돼요?"


라고 물어봅니다. "그럼, 저는 당연히 되지! 오늘 한국어 구연동화 할 건데, 너도 와서 꼭 들을 거지?"라고 했더니 힘차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덜란드어로 책을 읽는 자원봉사자와 합을 맞추어 보며 리허설을 합니다. 땀이 뚝뚝 떨어지지만 오늘 이 더운 곳에 와 준 학부모들과 아이들을 위해 한복을 끝까지 입고 잘 마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결국 줄줄 흐르는 땀을 보더니 선풍기를 제 옆에 가져다줍니다.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동화구연에 들어갑니다. 아이들이 초롱초롱하고 반짝반짝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봅니다.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귀를 쫑긋 세우고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위해 집중을 합니다. 이제 동화가 다 끝나고 어린이 담당 사서가 각종 의성어를 네덜란드어와 비교해 봅니다.


사서와 제가 응답시간을 가지며 한국에서 동물들이 내는 의성어는 어떤지 묻습니다.


"여러분, 네덜란드어로 호랑이는 Grrrom이라고 하지요? 한국어로는 어흥입니다. 하지만 그냥 어흥이라고 하면 안 되고, 배에다 힘을 빡 주고 목소리를 낮추어 어~~~ 흥이라고 해야 해요. 매가리 없는 호랑이가 되지 않으려면 배에다 힘을 줘야죠? 어린이들, 따라 해 보세요! 어흥!"


이렇게 벨기에의 도서관에는 한국 호랑이의 어흥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 이후에는 각종 동물이 그려진 주사위를 던져보며 기억하는 한국의 의성어를 내보기도 했고요.

구연동화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몰랐던 한 아빠는 핸드폰을 계속 쳐다보다 내용을 듣고 슬쩍 핸드폰을 바지주머니에 집어넣었습니다. 구연동화가 끝난 후 아이들은 부모님이 같이 놀아주지 않고 계속 핸드폰을 보고 있을 때 핸드폰을 보관할 수 있는 종이 보관함을 함께 만들었습니다. 구연동화를 다른 만들기 액티비티와 연동을 시켜 아이들이 더 재미있게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고, 추억이 담긴 물건을 집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함께 데려간 저희 집 첫째와 둘째도 신이 나서 펭귄모양 핸드폰 보관함과 판다모양 보관함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로, 제 핸드폰이 사라지면 꼭 그 안에 들어있더군요.

판다인지 쥐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판다와 펭귄이라네요

벨기에에서 한국어로 울려 퍼진 어흥, 그리고 한국어로 전해진 어린이 동화.

대한민국이 광복이 되어서 이런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이겠지요? 백범 김구 선생님은 1947년, 나의 소원에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중략>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중략>

동포 여러분! 이러한 나라가 될진대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네 자손을 이러한 나라에 남기고 가면 얼마나 만족하겠는가. 옛날 한토(漢土)의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를 사모하여 왔고, 공자(孔子)께서도 우리 민족이 사는 데 오고 싶다고 하셨으며, 우리 민족을 인을 좋아하는 민족이라 하였으니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는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렇게 사모하도록 하지 아니하려는가.

나는 우리의 힘으로, 특히 교육의 힘으로 반드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 우리나라의 젊은 남녀가 다 이 마음을 가질진대 아니 이루어지고 어찌하랴!


라고 하셨습니다.


백범 김구선생님이 그렇게 소원하신 대로 많은 나라에서 한국을 가고 싶은 멋진 나라,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얼마나 뿌듯하실까요. 저 또한 교육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더욱 더 한국에 대해 알게 되고 가깝게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이 먼 땅에서 계속하려 합니다.

여러분들도 뜻깊은 광복 80주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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